[2020 행복원정대/동아행복지수]<2>‘삶의 여유’가 가른 행복
오후 4시에 울려 퍼진 이른 퇴근 인사. 이런 인사를 받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누가 들어 주길 바라며 외친 게 아니다. 홀로 일과를 끝내며 뿌듯함을 표현한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자택은 일터에서 불과 15초 거리. 1년여 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상사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억지로 끌려갔던 술자리도, 일과 시간에 끝내지 못한 업무에 대한 부담도 없다. 집에 와선 식사를 한 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그리고 오후 10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홈쇼핑 업체를 그만두고 올해 9월부터 전북 남원시에서 홀로 흑염소 농장을 운영하는 ‘새내기 귀농인’ 최기표 씨(36)의 하루 일과다.
동아일보와 딜로이트컨설팅이 개발한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 응답자의 직업별 행복도에서 농림 및 축산업 종사자의 동행지수가 62.74점으로 모든 업종 중 가장 높았다. 최 씨는 “귀농 생활은 대도시 직장 생활과 달리 ‘나만의 시간’이 많다. 내가 스스로 하루를 계획하고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 “농촌에서는 내가 사장님”
“새 가족 생겼어요” 올해 9월부터 전북 남원시에서 흑염소 농장을 운영 중인 귀농인 최기표 씨가 6일 자신이 키우고 있는 흑염소를 안고 있다. 지난해 홈쇼핑 업체를 그만두고 귀농한 그는 “귀농 생활은 도시 생활과 달리 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남원=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5일 농장에서 만난 최 씨는 하루 두 차례 염소에게 밥을 주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을 산책하거나 지인을 만나며 보냈다. 그는 “이해관계로 얽힌 인간관계의 불편함도 없어졌다”고 했다. “홈쇼핑 업체를 다닐 때는 하루 최대 80개 업체 관계자와 통화를 주고받았다. 휴대전화에 등록된 관계자만 500명에 달했다. 업무로 얽힌 사람들과는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풍요 속 빈곤’을 느꼈다. 지금은 고향 친구, 부모님 등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폭은 좁아도 행복은 커졌다.”
스트레스가 사라지자 건강도 좋아졌다. 최 씨는 “수면 시간이 충분해서인지 혈압이 낮아졌고 섬진강 주변을 산책하며 명상을 해 정신 건강도 되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농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면서도 “도시 직장인도 ‘나만의 시간 갖기’ 등 귀농의 장점 중 일부를 활용한다면 행복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하루 일과를 조절할 수 있는 귀농인은 가족과의 시간을 직장인보다 많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는 ‘가족’을 ‘경제적 안정’보다 중시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동행지수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경기 용인시에서 버섯 농장을 운영하는 귀농인 홍성욱 씨(36)는 “(직장인보다) 자녀 등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고, 자연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 대도시에서 멀어질수록 행복한 사람들
귀농인은 행복한 환경을 찾아 삶의 터전을 바꾼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이사하지 않더라도 대도시를 떠나는 잠깐의 시간을 누리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직장을 다니는 김선형 한국통합저작권보호협회 이사(60)는 주말마다 경기 평택시로 향한다. 50평의 텃밭에 고구마와 감자 등을 재배하며 주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했다. “주말에도 도시에 남아 있으면 일과 관련된 생각을 잊기가 쉽지 않다.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고 수확할 때가 되면 성취감도 느낀다. 텃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행복해진다.”
▼ 휴양같은 제주생활? 현실은 다르네 ▼
16개 시도중 심리적 안정 1위… 관광지 한철 장사에 물가 비싸
경제적 만족도는 6위에 그쳐
동아일보-딜로이트컨설팅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의 동행지수는 전국 4위(59.97점)였다. 풍요로운 자연 환경과 여유로운 생활이 조화를 이룬 도시답게 제주도 주민들은 심리적 안정(1위), 일상생활 만족(2위) 항목에서 높은 만족감을 보였다. 그러나 경제적 만족(6위)과 업무 만족(7위), 건강(9위) 순위는 낮았다.
경북 경주시에 살다 올해 1월 제주도에 정착한 김인영 씨(34·여)는 “서울 등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업소 등을 운영하지만 이는 휴가철에 집중되기 때문에 수입의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의 물가가 높은 편이어서 생활비 문제로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제주도에 사는 대도시 이주민과 원주민 모두 건강 문제에 대한 행복도는 낮았다. 강 소장은 “종합병원이 제주도 도심에 집중돼 있다 보니 외곽 지역 거주자들은 건강 상태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암 등 중병에 걸렸을 때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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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
△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 △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 △사회부=박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