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대중교통 이용의 날’을 맞아 운행한 국내 최초의 캐릭터 래핑 ‘타요버스’.
조성하 전문기자
교통수단에 국한해 보면 이렇다. 캐나다는 나무늘보도 혀를 찰 만큼 천천히 차를 몰며 보행자를 배려하는 예의가 있고, 미국은 사막의 교차로에서조차 도로주행시험 볼 때처럼 정확히 차를 멈추고 고개를 양옆으로 돌려 살핀 후 출발하는 정직함이 있다. 유럽에선 느릿느릿 운행하는 노면전차와 휠체어 승객까지 수시로 타고 내리는 시내버스의 여유를 수입하고 싶고, 홍콩과 싱가포르에서는 언제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택시의 편리함이 좋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것은 잘 교육받은 여인처럼 품위 있게 운행하는 일본의 버스다. 승객에 대한 그 세심한 배려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구현한 서비스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이렇듯 칭찬을 아끼지 않는 데는 일본 버스와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울 만큼 낙후한, 아니 무례하기까지 한 우리 버스에 대한 낙담이 자리 잡고 있다.
승객에 대한 배려는 더 섬세하다. 정류장의 승객은 우리처럼 이리저리 뛸 필요가 없다. 버스가 한 대씩 차례로 다가와 문을 열어서다. 뒤차는 앞차가 승객을 태우는 동안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다. 차 안의 하차 승객도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문을 연 후에야 일어선다. 후불제인 시내버스에선 요금함 옆 잔돈교환기에서 거스름까지 바꿔야 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놀라운 건 승객이 다 내릴 때까지 승차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 승객이 다 내린 뒤에야 태운다. 그런 뒤에도 기사는 승객이 자리에 모두 앉은 걸 확인하고 출발한다. 버스 안에 방향표시등을 둔 것도 특별하다. 입석 승객에게 몸 쏠림을 예고하는 배려다.
우린 어떤가. 나는 7년째 일산∼광화문 노선의 광역버스로 출퇴근 중이지만 어느 하루도 불편을 거른 적이 없다. 어느 기사는 이어폰으로 20∼30분간 통화를 하며 운전하고, 어떤 이는 혼자 듣는 라디오나 CD를 크게 틀어놓는다. 운전석 뒤엔 운전에 방해가 되니 이 자리에선 전화 통화나 대화를 자제하라는 안내문까지 써 붙여 놓고서. 머뭇대는 앞차에 혼잣말로 욕설을 퍼부으며 난폭하게 추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이건 ‘불편’에 그치니 그런대로 넘긴다. 그게 법규 무시, 난폭주행에 이르면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다. 퇴근길 야간의 수색∼일산(버스전용) 구간. 중앙선 넘어 역주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지신호에도 시속 80km 이상 고속으로 교차로를 폭주하는 난폭운전이 거의 일상사다.
그뿐인가. 내리려면 이런 폭주 중에도 미리 문 앞으로 나가야 한다. 정류장엔 얌전히만 세워줘도 감지덕지.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급히 서는 경우가 태반이다. 운전기사 안중에 승객이 없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지난 7년간 버스가 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아니 그런 시도는 감히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불평을 늘어놓을 자격이 없다. 늘 앉아 가서다. 주변엔 언제나 근 40∼50분을 서서 가는 승객이 있다. 그들에겐 이런 것이 호강에 겨운 불평일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나보다 몇 배나 더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버스, 안타깝지만 이것도 우리 문화다. 동시에 우릴 재는 척도다. 이런 승객 취급과 운전 난폭성, 법규 위반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그 배경은 ‘사람에 대한 예의’의 부재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