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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의 시장과 자유]경제계 연말 화두 ‘졸면 죽는다’

입력 | 2015-12-09 03:00:00


권순활 논설위원

재계 서열 30위 안팎인 A그룹은 얼마 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대한상의 주최 간담회 발언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를 복사해 간부들에게 나눠 주었다. 우리가 직면한 대내외 경제상황은 ‘졸면 죽는다’가 가장 적합한 말이라고 강조한 내용이었다.

A그룹은 기술력을 중시하는 조직 문화 덕분에 글로벌 불황 속에서도 그 나름대로 잘 버틴 기업이다. 그러나 임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신문 스크랩 배포’라는 아날로그 전달 방식을 택했다. ‘졸면 죽는다’는 화두(話頭)는 연말을 맞은 경제계 이곳저곳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기업도, 산업도 사면초가

한국 경제는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국가적 난국을 경험했다. 오일쇼크 때는 해외 건설 진출과 산업구조 조정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외환위기 때는 미국 경제의 호황을 활용해 수출 증대로 위기를 돌파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는 해외시장 공략과 함께 치수(治水)와 경기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겨냥한 4대강 사업으로 활로를 뚫었다.

현재 한국의 주력산업 중 건설 조선 석유화학 철강업종은 위기 조짐이 뚜렷하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전자와 자동차업종도 앞날을 낙관하기 어렵다. 해외 변수 역시 악재만 두드러진다. 오일쇼크나 외환위기가 급성질환이었다면 지금 우리 경제와 기업이 직면한 위기는 누적된 문제가 겹친 만성질환 성격이 짙고 그만큼 파장도 길어질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하는 ‘세계 500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 기업은 10년 전 9개에서 올해는 절반도 안 되는 4개로 줄었다.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이 늘어도 시원찮을 판에 기존의 글로벌 기업마저 위축되는 하향 평준화가 진행되는 현실이다.

요즘 우리 경제계에서 미국의 석학 피터 드러커가 격찬한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찾긴 어렵다. 3, 4세 경영자 중 상당수는 과감한 도전보다 안전 운행을 선호한다. ‘이재용 삼성’의 잇단 계열사 매각과 주주 배당 확대도 좋게 평가하면 ‘집중과 선택’ ‘주주중시 경영’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삼성의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고 자신감을 잃어간다는 적신호일 수 있다.

기업인들의 자세에도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가로막는 핵심 변수는 정치권, 특히 야당을 쥐락펴락하는 ‘386 운동권’식 낡은 이념의 망령이라고 본다. 논란이 뜨거운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만 살펴보자. 이 법과 비슷한 일본의 산업경쟁력 강화법은 정부의 각의 결정 후 두 달도 안 돼 의회를 통과했다. 집권여당인 자민당은 물론이고 제1야당인 민주당 의원들도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野 ‘운동권 경제관’ 벗어나라

반면 한국의 원샷법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재벌 특혜법’이란 낙인을 찍어 법안 제출 후 넉 달이 넘도록 상임위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하기야 법안 제출 후 4년 가까이 야당의 반대로 표류하는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발목 잡기는 ‘약과’라고 해야 하나.

독일의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는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야당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총선과 대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 불황 속에서도 야당의 지지율이 바닥인 것을 보면 그런 기대가 국민에게 얼마나 먹힐지 의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고 했지만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