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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2015년 최고와 최악

입력 | 2015-12-10 03:00:00


2015년도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 뇌리와 심장에 ‘최고’ 혹은 ‘최악’으로 아로새겨져 있는 올해의 영화들을 꼽아본다.

①최고의 카피=“희망 없는 세상, 미친놈만 살아남는다”라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광고문구가 으뜸이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후 소수 생존자들이 물과 기름을 선점하기 위해 약육강식의 도륙을 벌이는 지옥도가 담긴 이 영화의 심장을 이토록 제대로 꿰뚫는 문구가 또 있을까 말이다.

망하진 않았지만 성공하지도 않은 곽경택 감독의 신작 ‘극비수사’의 카피 “예언하는 도사, 움직이는 형사”도 ‘마더파더 젠틀맨’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이상 인기가요 가사)만큼이나 라임이 딱딱 들어맞는 직관적이고 주도면밀한 경우.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포스터에서 피 칠갑 대걸레를 들고 선 이정현의 모습과 더불어 등장하는 짧고 강력한 문구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어요”도 기발한 충돌과 부조리의 냄새를 풍겨낸다. “진짜 나를 만날 시간”이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카피는 거의 예술의 경지.

‘007 스펙터’에 본드걸로 나오는 묘한 느낌의 여배우 레아 세이두가 출연한 프랑스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의 다음과 같은 카피도 아저씨 관객들의 심장을 벌렁벌렁하게 만든다. “착하고 훌륭한 하녀가 되기로 했다.” 아, 얼마나 섹시하고 상상력을 팍팍 자극하느냔 말이다. 하지만 매우 실망스럽게도 영화 속 하녀는 화끈하기보단 진짜로 착하고 훌륭해서 탈이란 사실.

최악의 카피도 있다.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 ‘베테랑’의 카피는 놀랍게도 ‘2015년 여름, 최고의 베테랑들이 온다!’이다. 쌍팔년도 혹은 근대화 시대의 카피로 착각할 만큼 올드하지만 직설법이 때론 통하는 듯. 추석 연휴를 노려 개봉했다가 망한 설경구 여진구 주연의 ‘서부전선’ 포스터에 대문짝만 하게 나오는 선전문구 “풍요로운 추석 명절과 무사귀향을 기원합니다”는 영화를 보고픈 의욕 자체를 근절시켜 버리는 흑마술을 부린다.

②최고로 짜증나는 제목=‘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남매 감독의 신작 ‘주피터 어센딩’은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도대체 뭔 말인지 몰라 역정이 나는 경우. 할리우드 공포영화 제목 ‘위자’는 무슨 가터벨트를 한 마담 이름 같은 에로틱한 냄새를 풍기는 최악의 케이스다. 더불어 ‘라자루스’는 공포영화 제목임에도 신개념 안마의자나 발모제를 연상시킨다.

‘특종: 량첸살인기’는 아예 관람을 포기하고픈 지경이고, ‘쎄시봉’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관습적이고 안일한 경우이며, ‘엘리노어 릭비’는 엘리노어 릭비, 엘리노어 릭비, 엘리노어 릭비, 엘리노어 릭비, 엘리노어 릭비 다섯 번 발음해도 입에 붙지 않을 만큼 독일군 암호 수준이다. 주지훈 주연의 사극 ‘간신’도 이야기가 품은 깊은 층위와 달리 이 영화를 얇고 단순하고 유치하게 보이게 만드는 ‘신의 악수(惡手)’다.

‘꽃보다 처녀귀신’ ‘좀비 파이트 클럽’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이것저것 좋다는 건 죄다 갖다 붙인 하이브리드형 제목이지만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 ‘착한 처제’ ‘자매의 방’ ‘친구엄마’도 에로영화 제목으로는 이 글로벌 시대에 감각적으로 뒤처져 보인다. 차라리 ‘착한 스펙’ ‘엄친딸의 방’ ‘대치동 돼지엄마’ 같은 제목이 가일층 섹시하고 트렌디하지 않았을까.

걸그룹 미쓰에이의 예쁜 멤버 수지가 주연한 ‘도리화가’도 ‘도+리화가’인지 ‘도리+화가’인지 ‘도리화+가’인지 ‘도+리+화+가’인지 알 수 없어 짜증 제대로 나는 제목.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라는 일본 영화 제목은 비범한 영화를 평범하게 포장한 경우다. ‘나의 절친 악당들’이란 제목은 포스트모던하다 못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의 내용과 딱 들어맞지만, 영화 제목이라기보단 매주 수요일 밤 11시 tvN에서 방영하는 예능 프로 제목인 것만 같다.

③최고의 대사=사생활 문제로 찌그러져 있던 이병헌이 다시 발딱 서게 된 영화 ‘내부자들’. 여기서 일자무식한 조폭 두목 이병헌이 검사 출신 조승우에게 던지는 마지막 대사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 할까”가 단연 일등이다. 이토록 정감어리고, 내용을 함축하며, 빵 터지는 대사가 또 있을까.

1970년대 서울 강남 개발을 둘러싼 조폭들의 우정과 배신을 그린 영화 ‘강남 1970’에서 미남 배우 이민호가 던지는 “쓸 때 쓰고 버릴 때 버리는 게 건달 아닙니까”라는 외마디 대사도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관통하는 명대사. 어떤 주부 관객은 이 대사를 재활용하여 “쓸 때 쓰고 버릴 때 버리는 건 건달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생활 속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 ‘2015년 최고와 최악’은 무비홀릭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