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오피니언팀장
그는 그해 12월 서울 노량진에서 군에 소집됐다. 약식훈련을 받고 이듬해 2월 네덜란드군에 배속됐다. 7개월 전 한국에 온 1개 대대였다. 참전 16개국 중 네 번째로 파병됐다. 그해 12월 강원 철원에서 소대원들과 척후작전에 나섰다. 적 전초기지 앞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소대장은 기관총 탄약이 떨어지자 탄약수인 그에게 탄약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십자포화에 갇힌 채 150m를 기어가 탄약통 2상자를 가져왔다. 결국 기지를 장악했다. 이 공로로 미군 2사단장으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여러 전투를 치렀고 5년 뒤 제대했다. 올해 82세인 곽경찬 옹이 전화로 들려준 말의 줄거리다.
그는 6·25전쟁 발발 2개월 뒤 대구에서 입대했다. 열아홉 살 학도병이었다. 실제로는 징집이었다고 했다. 전선에 내보낼 병력이 태부족인 시절이었다. 제일 먼저 도우러 달려온 미군, 그 미군의 3사단에 배속됐다. 한국군 지휘권을 넘겨받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 결과라고 했다. 일본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은 뒤 전선으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두 노병의 사연이 거의 같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동성무공훈장을 받은, 아주 드문 80대 노병이라는 점은 똑같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행로가 크게 갈린다. 곽 옹은 제대한 뒤 한국 국방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네덜란드군 대대장이 그의 무공을 한국군에 알린 덕분이었다. 잃어버렸던 동성무공훈장 훈장증도 1985년에 새로 발급받았다. 곽 옹은 참전수당과 무공수당을 합해 매달 30만 원 가까이 받는다.
박 옹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며 1987년부터 거의 해마다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불가 통보를 받았다. 미국 훈장은 안 된다는 답변과 함께….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군인’이라고 칭송됐던 고 김영옥 대령 같은 전쟁 영웅도 6·25전쟁에 참전해 은성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런 굉장한 훈장이 그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형편도 어려운데….
보훈처의 일 처리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합당한 결정이라고 본다. ‘행정 만능주의’라고 비난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지금 두 노병의 마음가짐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점만은 짚고 싶다.
곽 옹은 종종 훈장 2개를 달고 외출한다. 그는 “참전은 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지금도 애국심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겠다”고 말한다. 반면에 박 옹은 개를 줘도 쳐다보지 않을 동성무공훈장이 무슨 소용이냐며 원망이 가득하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박 옹의 울분에 누가 응답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