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천재 아닌 휴머니스트였다
평전의 첫 문장은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로 시작한다. 변론은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출발한다. 초고의 완성 시점으로 따지면 10년 터울이 지는 두 글의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세상 사람들은 조영래를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천재이기 이전에 다정다감한 휴머니스트였다. 심금을 울린 그의 글들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것이 아니다. 조영래는 대학 다닐 때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자주 들었다.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붓방아를 찧던 그가 불현듯 이 노래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조영래는 1969년 법대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 그러나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焚身)은 그를 뒤흔들었다. 책을 덮고 장기표와 함께 전태일 장례식을 위해 재야와 종교계를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보낸 몇 달 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연수원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1년 6개월간 복역한다.
그는 출소 뒤 다시 ‘민청학련사건’으로 6년간 수배당한다. 그때 전태일과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5권의 일기장을 꼼꼼히 읽고 여성 근로자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생전에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집까지 여러 차례 걸어갔다. 3년에 걸쳐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25년 전 오늘 조영래 변호사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3세였다. 그때 사회부 기자로 내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음을 들은 김중배 편집국장이 “영래가 죽었다, 조영래가 죽었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누가 조영래를 모르시나요
시대의 고민을 안고 줄담배를 피우던 조영래, 87년 대선 후보 단일화를 위해 진력했으나 실패한 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7년 남짓 변호사로 불꽃같이 살다 간 그는 진보와 보수의 통합을 꿈꾸었다. ‘전태일의 부활’에 힘썼던 그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수구(守舊) 귀족노조 민노총을 보면 어떤 생각에 잠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