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토요일에 만난 사람]“55년 전엔 61위… 평창에선 메달 따야죠”

입력 | 2015-12-12 03:00:00

겨울올림픽 한국 첫 스키 출전 임경순 씨




임경순 단국대 명예교수가 예전에 타던 스키(오른쪽)와 요즘 타는 스키를 보여주고 있다. 1960년 스쿼밸리 겨울올림픽에 스키도 없이 출전했던 임 명예교수는 “개최국 미국에서 준 스키가 좋긴 했지만 내가 타던 것과 달리 에지가 있어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며 웃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스키 시즌이다. 개장을 기다려온 스키어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새하얀 설원을 수놓고 있다. 지난 주말(5일) 경기 광주에 있는 스키장 곤지암리조트도 문을 열었다. 곤지암리조트는 올해 개장을 앞두고 65세 이상 스키어들로 구성된 ‘곤지암 스키클럽’을 만들었다. 스키 1세대와 그 가족이 함께 스키장을 찾아 스키 저변을 확대하는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에서다. 곤지암리조트는 스키하우스 1층에 ‘임경순 선생 특별전’을 마련했다. 임경순 단국대 명예교수(85)는 곤지암 스키클럽의 초대 회장이다. 그가 누구이기에 국내 최초의 ‘실버 스키클럽’ 회장을 맡고 그를 위한 특별전까지 마련됐을까.



스키도 없이 출전한 겨울올림픽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간 격이었다. 196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쿼밸리에서 열린 제8회 겨울올림픽에 출전한 임경순 씨(당시 30세)가 그랬다. 그는 당시 스키도 없이 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은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2월 제5회 생모리츠(스위스) 겨울올림픽에 처음으로 대표팀을 파견했는데 출전한 3명 모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한국 스키어로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인물이 임 씨다.

“스케이트야 사방에 널린 연못이나 논이 얼면 거기서 탈 수 있으니 하는 사람이 많았지. 스키야 어디 그럴 수 있나. 눈이 쌓인 산까지 가야 하니 그것부터 쉽지 않고 스키를 갖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대한스키협회는 1957년 국제스키연맹(FIS)에 가입했다. 이전까지 스키나 썰매로 국제 스포츠대회에 나간 적이 없었기에 다가오는 1960년 겨울올림픽 출전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최종 승인을 받았지만 미국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가난했던 시절, 국가대표라고 제대로 지원을 받았겠습니까? 겨우 비행기 삯과 식사비 정도만 나왔을까. 물론 타던 스키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구한 고물을 가져갈 수는 없었습니다.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했죠. 아내가 결혼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에 이것저것 보태 경유지인 일본에서 스키를 살 계획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라 일본이 입국을 거부한 거예요. 스키 없이 갈 수 밖에 없었죠.”

현지에서 스키 부츠와 장갑은 자비로 샀지만 스키는 너무 비쌌다. 망설이고 있던 차에 개최국 미국의 임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이라는 눈이 없는 나라에서 스키도 없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활강, 회전, 대회전 등 3종목에 나간다고 하니 활강용과 회전용 스키 2개를 주더군요. 당시 대회 스폰서를 했던 회사의 새 제품이었죠. 처음에는 너무 고맙고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타 보니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선수용 스키라 면도날 같은 에지(플레이트 옆에 쇠로 된 날 부분)가 달려 있는 거예요. 에지 있는 스키는 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습관대로 잔뜩 힘을 주고 타니 스키가 말을 안 들어요. 연습을 하는데 20∼30m씩 튕겨나가 눈 위를 굴렀죠. 출전을 일주일 앞두고는 점프를 하다 추락했어요. 점프를 해 본 적이 없어 타이밍을 놓친 겁니다. 패트롤에 실려서 의무실로 갔어요. ‘이제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당시 대한스키협회를 맡고 있던 신업재 회장이 병원으로 찾아 오셔서는 ‘누워 있으면 어떡하느냐. 스키를 타야지. 그래야 다음 올림픽 때도 우리 선수들이 올 것 아니냐’라며 호통을 치시더군요.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은 없어 바로 스키장으로 향했죠. 맞는 말씀이었죠. 어떻게 온 올림픽인데….”

우여곡절 끝에 출전했지만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활강은 61위, 회전은 40위에 그쳤다. 그나마 터키와 레바논 덕에 꼴찌를 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지 달린 스키도, 기문이 있는 코스도 처음이었고 3.2km나 되는 높은 곳에서 내려온 것도 처음이었다. 대회전은 기문 3개를 간신히 지난 뒤 기권했지만 다른 두 종목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넘어지면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도 이를 악물고 헤쳐 나왔다. 그는 “죽든 말든 골인은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가 스키하우스에 마련한 ‘임경순 특별전’. 곤지암리조트는 최근 스키 원로들을 주축으로 ‘곤지암 스키클럽’을 만들었는데 임경순 단국대 명예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곤지암리조트 제공

日스키부대 보고 시작한 스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임 씨는 7세 때 가족과 함께 중국 지린 성으로 갔다. 개인회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출장소 책임자로 파견을 갔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가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고 중국 게릴라들이 횡행했다. 아버지는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 1년여 뒤에 퉁화 성(옛 만주국의 성) 퉁화 시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퉁화합동인쇄주식회사’라는 곳에서 임원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퉁화 시는 추운 곳이었다. 겨울이면 눈이 산처럼 쌓여 자동차가 다닐 수 없었다. 일본 스키부대 군인들은 강을 따라 스키로 이동했다. 썰매에 군수품을 실은 채 하얀 옷을 입고 눈 위를 달리는 그들이 13세 임 씨의 눈에는 멋져 보였다. 아버지를 졸라 스키를 구했다.

“퉁화 성에 일본인이 지은 스키장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점프대까지 설치한 곳이었죠. 집에서 스키장까지 십 리를 오가며 스키를 탔습니다. 스키장에서 점심으로 단팥죽 한 그릇 사 먹고 하루 종일 눈 위를 달렸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독학으로 스키를 익혔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더군요.”

광복이 되기 두 달 전 임 씨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지주이자 기독교인이고 지식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공산당이 장악한 북한 사회에서 대표적인 ‘반동’이었다. 임 씨가 16세였던 1946년 6월 가족은 고생 끝에 서울로 왔다.

“아버지가 안내원을 한 명 붙여 주셨어요. 2남 2녀 중 장남이었던 제가 동생들을 데리고 38선을 넘었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리원에서 해주로 이사 가는 것처럼 꾸며 짐을 싼 뒤 그 짐을 배에 싣고 인천항으로 들어오셨어요.”

꼭 필요한 짐만 챙겨 오느라 스키는 두고 왔다. 다시 스키를 타고 싶었지만 당시 서울에 스키를 파는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서울역 근처에 조그만 사무실을 냈는데 마침 옆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한스키협회 관계자였다. “우리 아이가 스키를 타고 싶어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는 “내가 쓰던 것을 주겠다”고 했다. 닳고 낡아빠진 나무 스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이 있는 정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차산을 다니면서 스키를 탔어요. 리프트가 없던 시절이라 스키를 짊어지고 산길을 걸어 올라갔죠. 경신중학교에 다니면서 아차산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출전했는데 두 종목에서 1등을 했어요.”

군 복무를 마친 그는 2년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하며 틈틈이 스키를 탔다. 짬을 내 대회에도 참가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포인트를 쌓아 놓은 덕분에 그는 겨울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 있었다. 올림픽에 다녀온 뒤에는 명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국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사회였다. 교사로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단국대에서 연락이 왔다. 겨울 종목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장충식 총장이 그를 눈여겨본 것이었다. 1968년 그는 단국대로 직장을 옮겼다. 국내 첫 대학 스키부를 창설했고 감독까지 맡았다. 단국대 스키부는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겨울 유니버시아드 대표팀과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일하며 한국 스키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설원을 누비는 임경순 단국대 명예교수. 그는 지난해부터 그림을 시작했는데 이미 입선 경력까지 있다. 임경순 씨 제공

“평창? 메달 따야지… 뭐든 시작하면 끝을 봐야 돼”

“1960년 올림픽에 출전한 뒤 15년이 지나 한국에 처음 리프트가 있는 용평스키장이 생겼어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훈련을 하면 리프트 없는 곳에서 20일 동안 스키를 타는 것과 맞먹는 훈련량이더라고요. 아니다. 그것도 비교가 안 돼요. 20일을 타도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속도 훈련은 할 수 없으니까요. 리프트로 올라가 스키를 타다 보니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올림픽에 나갔을 때보다 실력이 더 좋아진 것 같더라고요. 하하.”

노력은 재능을 능가한다. 임 씨는 노력파다. 단국대로 간 뒤 교양체육 과목을 가르칠 때 일이다. 석사학위도 없이 강단에 선 그를 선배 교수들이 좋게 볼 리 없었다. ‘총장 낙하산’이라며 노골적으로 괄시하는 교수도 있었다.

“사회 과목 선생이던 내가 체육 이론에 대해 제대로 알 리가 없었죠. 이를 악물고 공부했습니다. 전날 밤에 교재를 요약해 ‘커닝 페이퍼’처럼 만들어 놓고 출근길 버스에서 모조리 외웠죠. 점점 강의에 재미가 붙더군요. 아, 제가 경신중에 다닐 때 야구도 했어요. 여름에는 스키를 탈 수 없었으니까요. 투수였는데 소년체육대회에서 준우승까지 해 봤죠. 언젠가 단국대 교직원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투수를 하며 홈런까지 때렸습니다. 그 뒤로는 고개 좀 들고 다녔죠.(웃음)”

그는 지난해 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키도 그랬듯이 그림도 독학으로 익혔다. 하루에 3시간 이상 그림에 몰두했다.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솜씨가 벌써 수준급이다. 대한민국 명인미술대전에서 입상까지 했다.

대한민국 첫 스키 올림피안인 그에게 한국 스키가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그가 겨울올림픽에 출전한 이후 55년이 흘렀지만 한국 스키는 아직도 올림픽 메달이 없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대답은 “가능하다”였다.

“대한스키협회가 제 역할을 못했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달라진 것 같아요. 스키 본고장인 유럽 선수들에 비해 우리 선수들의 체격이 뒤진다고 하는데 그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신체 조건이 비슷한 일본에서는 이미 1956년 코르티나담페초(이탈리아) 겨울올림픽 회전 종목에서 이가야 지하루(84)가 은메달을 땄잖아요. 우리도 이미 유니버시아드에서는 금메달을 얻었고요. 스키협회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사상 최대의 지원을 해 주고 있는데 돈의 액수보다는 제대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뭐든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 안 그런가요?”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