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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기자의 談담]“죽음은 신의 뜻, 삶은 인간의 몫… 나누며 살아야죠”

입력 | 2015-12-14 03:00:00

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겸 서울대 명예교수




《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학자인 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겸 서울대 명예교수(78)에게 질문했다. “폭력시위를 주도했던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서 25일간 은신했습니다. 다친 새가 날아들면 품어 안는 게 종교의 속성 아닐까요. 그런데 그를 거둬준 종교계 온정이 사회 정의에 반한다는 얘기도 많습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정 이사장은 “학자가 직접적으로 얘기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전제한 뒤 말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중첩된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자기 주권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정교(政敎)분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를 서술한 헌법도, 법률도 자기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어쩌면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현실 적합성을 확보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정치는 정치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우리 사회에 적합할 것인가 깊게 사색해야 합니다.” 》

최근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난 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겸 서울대 명예교수는 “꽤 오래 살게 된 새로운 삶의 경험 시대에 담담하게 삶과 죽음을 안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승윤기자 tomato99@donga.com

김선미 기자

‘우주와 역사’ ‘성(聖)과 속(俗)’으로 유명한 20세기의 세계적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1907∼1986)를 사사하고 국내 종교문화의 토대를 세운 정 이사장은 지금껏 ‘긴 사색’을 강조해왔다. 그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였던 시절(1982∼2003년), 그의 강의는 서울대 인문대 명(名) 강의로 유명했다. 그의 말과 글은 당시나 지금이나 느릿한 만연체여서 처음 접하면 거북하고 불편할 수 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의 얘기는 듣는 사람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극단주의 이슬람국가(IS)가 주도한 프랑스 파리 테러, 부모의 재산에 따라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로 나누는 ‘수저계급론’…. 불평등과 분노가 가득 차 보이는 지금 여기 이 세상에 사랑과 자비는 있는가. 연말을 맞아 그의 긴 사색을 조용하게 나누고 싶어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서 최근 만났다.

종교란…

―IS는 왜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무모한 테러를 일으킬까요.

“종교는 신념을 기반으로 합니다. 삶을 근원적으로 긍정하기도 하지만 맹목적이고 편리한 환상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IS의 테러는 자기를 주장하고 확산하기 위해 순교라는 이름의 독선적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 폭력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정치경제적 요인들이 얽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테러는 잘못된 종교행위라는 걸 지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응징하기 위해 군사적 행위는 불가피하지만, 자신들의 폭거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전승된 기억’을 공감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이를 간과하면 보복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근원적 물음에 다다릅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는 인간이 희구하는 꿈의 결정체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서 드러난 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봅니다. 다만 지금 여기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희구가 낳은 문화여서 그 내용이 신성(神性)으로 개념화되어 있을 뿐입니다. 신의 속성이나 종교의 특성은 제각기 그 종교가 출현한 그 사람들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종교가 여럿인 이유죠. 그러므로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 경험을 절대적 준거로 해서 다른 종교를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너무 낭만적 생각 아닐까요. 세상은 점점 극단화되고 있습니다만.

“극단주의가 출현하는 것은 자기 존재감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폭력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보복을 위한 폭격 아래에서 울부짖는 부모와 아이들이 있다는 걸 얘기하는 목소리도 있어야 합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전율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사태를 이미지화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바닥을 정직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회주의자, 낭만주의자, 비현실적 인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합니다.”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왜 종교 인구는 감소할까요.

“첫째는 제도 종교의 쇠퇴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적합성 없는 얘기를 권위에 의거해 강제된 규범으로 제시하면서 실천하라면 못 견딥니다. 둘째는 사회구조가 달라지면서 개인의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에 종교도 이젠 사사로운 일이 됐습니다. 나름대로 편한 종교생활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이래저래 현대에는 종교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부유(浮游)하는 종교’라고 할까요. 종교 인구는 감소하는데 종교적 삶은 오히려 확장되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종교라는 말을 기피하면서도 종교적 가치를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이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씁니다. 종교라는 용어는 서서히 수명을 다한 것 같습니다.”

―한국 종교의 문제점 중 어떤 게 가장 걱정됩니까.

“위선과 부패, 독선과 배타 등 이익집단이 갖는 온갖 부정적 측면을 일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종교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환상을 지니는 점입니다. 자기를 이 세상에 대한 절대적 심판자로 여기죠. 이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종교의 갱신은 어렵습니다. 자기 성찰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죽음을 앞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 대신 편안한 죽음을 사전에 미리 결정해 둘 수 있는 법률안(연명의료 결정법안)이 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국내에서 존엄사 논의가 시작된 지 18년 만이다. 정 이사장은 그동안 죽음을 깊게 연구해 온 학자이다.

―일명 웰다잉(well-dying)법에 대해 종교계는 여전히 우려합니다.

“웰다잉법은 필요합니다. 다만 구체적이고 자상한 시행령과 윤리강령으로 보완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죽음의 자기결정권 논의는 결국 ‘인간은 인간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풍토를 가져올 수 있거든요. 죽음결정권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승인되면 ‘의도적 살인’도 가능해집니다.”

―평소 품위 있는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저 담담했으면 좋겠습니다.”

―담담한 죽음이라고요.

“죽음은 별난 일도 아니고, 나 혼자 당하는 일도 아니잖아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괴롭지만 조금은 더 고요하고 깊고 그윽했으면 좋겠습니다. 담담하게 살다가 회복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연명치료가 아니라 통증완화 치료를 바라는 사전의향서를 의사와 가족들에게 담담하게 작성해주면 어떨까요.”

―인간 삶이 길어진 것이 오히려 불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젊을 때부터 가족과의 관계도 따뜻하게 유지하고 사회적 역할도 맑고 의연하게 한 사람의 노년을 신은 축복할 겁니다. 언제 죽든 그건 신의 일이겠지만 그때까지 지속하는 삶의 질은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 가정, 국가가 함께 인간 삶의 질을 유념한 ‘죽음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보람 있는 죽음은 보람 있는 삶에서 비롯되니까요.”

나눔이란…

그는 2011년부터 4년간 맡았던 아산나눔재단(청년창업지원과 교육 등의 비영리재단) 초대 이사장을 두 달 전 내려 놓았다. 과거 그가 신문에 썼던 칼럼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2001)이 읽고 연락해 와 가깝게 지낸 인연을 알고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제안해 일했던 자리다.

―왜 그만두셨나요.

“2년씩 두 번 연임해 4년 일했는데 10월 이사회에서 또다시 맡게 되면 제가 나이 80이 되더라고요. 더 있으면 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게 되죠. 다른 사람들이 저 늙은이가 왜 앉아 있나 할 때 나오면 안 돼요. 100세 시대니까 80세에도 일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제가 제 정신으로 판단할 때 나와야 해요. 집사람이 ‘참 잘했다’고 하대요.(웃음)”

―4년간의 소회는요.

“나눔은 분배나 시혜가 아니라 참여입니다. 서로 빈 구석을 채워줘야 사람 구실을 합니다. 그 상호 간의 채움이 곧 나눔입니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의 ‘통 큰 기부’가 최근 화제가 됐는데요.

“기부가 돈 많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여겨질까 봐 걱정도 됩니다. 최근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오다 어느 중년 부인이 폐 상자를 리어카에 끌고 가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돈을 꺼내주는 걸 봤습니다. 일상 속의 그런 마음이 값진 나눔 아닐까요.”

―최근 동아일보가 진행한 ‘동아행복 시리즈’에 따르면 요즘 30대는 현실과 이상의 큰 괴리 속에서 행복감이 낮다고 합니다.

“작은 일상을 잃어버리고 너무 커다란 것만 보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전 요즘 종교문화연구소 제자들과 시장에서 두부를 먹으면서 소주 한잔씩 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요즘 어떤 신념으로 사십니까.

“거창한 이념이 갖는 작위성이 점점 두렵습니다. 그저 일상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쓰레기 잘 분류해 버리고, 신호등 잘 지키고. 일상을 배제한 이념, 일상을 간과하는 초월이나 신비. 그게 바로 미신이고 환상이고 기만 아니겠습니까.”



▼ 정진홍 이사장은 ▼

1937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왔다. 미국 오하이오 주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샌프란시스코신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목회학)를 받은 후 덕성여대 명지대를 거쳐 21년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를 지내고 2003년 정년퇴임했다. 한국종교학회장(1992∼1994년), 굿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이사장(2009∼2011년), 아산나눔재단 이사장(2011∼2015년 10월) 등을 지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을 맡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