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실습 ‘임금지급 의무 규정’ 슬그머니 빠져
상당수 대학이 현장실습을 부실하게 운영하면서 대학생들이 전공과 무관하게 무급으로 서빙이나 청소 등의 고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가 최근 입법예고한 현장실습 규정안에 임금지급 의무규정을 슬그머니 빼 부당 대우를 조장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DB
4년제 A대 경영학부에 다니는 김모 씨는 올해 여름방학에 플라스틱용품 제조공장에서 20일간 현장실습을 했다. 김 씨가 한 일은 출근하자마자 복도 청소를 하고, 하루 종일 포장용 박스를 조립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 8시간씩 일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김 씨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현장실습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A대의 졸업 요건에 ‘8주 이상의 현장실습’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A대는 ‘전공과 연관성이 있는 곳에서만 현장실습을 하라’는 규정을 두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학교가 전공에 맞춰 일일이 현장실습 업체를 연결해주기 어렵다 보니 결국 학생들이 알아서 회사를 섭외하도록 내버려두는 상황이다.
상당수 대학이 이처럼 현장실습을 부실하게 진행하다 보니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무급이라도 좋으니 현장실습할 곳을 구한다’거나 ‘아는 사람 회사에서 가짜로 현장실습 확인서를 받았다’는 글이 넘쳐난다. 현장실습이라는 명목만으로 전공과 무관하게 무급으로 서빙이나 청소 등의 고된 일을 한 뒤 ‘열악한 현장실습을 한 이후 취직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는 후기를 올리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부실한 현장실습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올해 상반기에 ‘열정 페이’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교육부는 새로운 현장실습 규정안을 만들겠다고 했다. 현장실습 과정에서 대학생들이 처할 수 있는 안전이나 부당 대우 등의 문제를 예방하겠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교육부가 7월 밝힌 현장실습 운영 규정 가안에서는 실습 기관이 학생들에게 임금이나 실습지원비에 상응하는 금액을 의무적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교육부가 행정예고한 ‘대학생 현장실습 운영규정 제정안’은 당초 가안과 달리 임금지급 의무 규정이 빠졌다. 교육부의 최종 규정안에서 실습비 지원이 의무가 아닌 선택(협의) 사항으로 슬그머니 바뀐 것. 규정안 제6조는 실습기관(기업)이 실습지원비를 ‘지급할 수 있다’고만 규정해 사실상 기업이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주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설령 돈을 지급하더라도 지급액은 ‘학교와 실습기관이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고 정해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 적용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로 남겨뒀다.
산학협력학회장을 지낸 한양대 김우승 교수는 “미국과 독일 등 산학협력이 정착된 대학들은 대학과 기업이 직접 협약을 맺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면서 “현장실습을 통해 학생들이 취업까지 이어지는 실력을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도 지속가능한 현장실습을 위해서는 대학이 현장실습 기업을 직접 관리하고, 학생들의 노동력을 사용해 이익을 보는 기업이 임금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부담 가중을 우려하는 교육부는 임금지급 의무화에 여전히 소극적인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기업의 부담이 늘어난다면 현장실습에 참여하고자 하는 기업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택 nabi@donga.com·임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