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로금리시대 마감]글로벌 금융시장 ‘신흥국 리스크’
○ 신흥국 중에서도 “브라질, 터키 등 불안”
LG경제연구원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돈 풀기’로 2009∼2014년 주식, 채권 투자, 대출 등의 형태로 신흥국에 유입된 해외자금이 3조5000억 달러(약 413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렇게 쏟아져 들어왔던 자금은 미 연준이 금리 인상 시그널을 강화하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올해 3분기(7∼9월)에 신흥국에서 순유출된 외국인 주식 및 채권 투자금은 338억 달러(약 40조 원)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 4분기(―1194억 달러) 이후 7년 만에 최대치다.
전문가들은 미국 금리 인상에 따라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 신흥국들의 외채 상환 부담이 더욱 높아져 부도 위기에 몰리는 신흥국들이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브라질과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러시아 등이 ‘위기 진원지’ 후보로 꼽힌다. 브라질은 3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기 대비 1.7% 감소하는 등 사상 최악의 경제침체를 겪고 있는 데다 달러 빚이 많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단기외채 규모가 큰 터키도 문제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말 현재 터키의 1년 미만 단기외채는 1295억 달러에 이른다.
유가 등 원자재 가격 하락 가능성은 자원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들에 또 다른 악재다. 신환종 NH투자증권 글로벌 투자분석팀장은 “내년부터 러시아 가스프롬, 브라질 페트로브라스 등 국영 에너지 기업의 회사채 만기가 대거 돌아온다”며 “유가는 여전히 낮고, 금리 인상으로 이자 부담이 늘어나면서 이들 국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 엇갈린 각국 통화정책도 혼란 부추길 가능성 커
기획재정부는 이날 내놓은 ‘중견국 경제동향과 취약요인 점검’ 자료에서 브라질 러시아 남아프리아공화국 태국 말레이시아 등 5개국을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자본 유출 우려가 큰 나라로 분류했다. 다만 정부는 이들 국가에 위기가 발생해도 한국으로 전이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조이고, 유럽과 중국은 푸는 가운데서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한 금리 인상과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 브라질은 지난해 10월 이후 일곱 번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14.5%로 끌어올렸다. 반면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앞서 10일 올 들어 4번째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전문가들은 각국 중앙은행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면 고금리를 쫓아 글로벌 자금이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시장이 출렁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본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릴 여력이 있느냐, 금리를 내렸을 때 수출 확대 효과를 볼 만한 제조업 경쟁력을 갖췄느냐에 따라 각국이 다른 통화 정책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 “신흥국 타격땐 한국 수출도 초비상” ▼
재계, 긴장속 대응책 마련 부심
전자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가 17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예고된 것이어서 한국 산업계는 비교적 차분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미국 금리 인상→달러에 대한 수요 증가→원자재 가격 하락→원자재 수출국 경제 침체’ 과정을 거치며 일부 신흥국이 위기에 빠진다면 한국 수출이 휘청거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자동차업계는 미국 금리 인상으로 원-달러 환율이 상승(원화 가치 하락)하면 수출에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기아자동차 1∼11월 미국 판매량 중 52%가 현지 생산이고 48%는 수출에서 나왔다. 환율이 상승하면 미국 자동차시장이 성장하는 상황에서 수익성이 개선돼 공격적 마케팅을 강화할 수 있다.
하지만 강한 달러 영향으로 신흥국에 투자됐던 자금이 빠져나가면 신흥국 경기가 위축될 수 있다. 이 경우 신흥국 수요가 줄어든다. 특히 현대·기아차는 신흥국에 수출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다. 1∼11월 현대·기아차 판매량 중 중국 비중은 20.4%로 미국(17.7%)보다 높다. 브라질 비중은 2.8%, 러시아는 4.1%였다. 결국 미국 금리 인상은 자동차 업계에 ‘양날의 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자동차뿐 아니라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제품, 자동차 부품 등 신흥국 수출 비율이 높은 업종은 대체로 미국 금리 인상의 긍정 및 부정적 영향을 모두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내년에 신흥국에 수출하는 물량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은 부정적이지만, 수출품 대부분이 달러로 결제되기 때문에 달러 강세로 인한 환차익은 긍정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반면 철강 및 조선업계는 미국 금리 인상을 우려하며 긴장하고 있다. 신흥국 철강 수요가 위축되면서 국내 철강사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달러 강세가 되면 달러 표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게 돼 국제시장에서 중국산 철강 제품과의 가격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
조선업계 또한 신흥국에서 선박 발주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강한 달러로 국제 유가 하락세가 고착화되면 해양플랜트 발주량이 줄어들고, 해양플랜트 취소 사태가 추가로 발생할 수도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계약을 달러화로 맺는 만큼 금리 인상이 달러 강세로 이어질 경우 매출 증대와 가격 경쟁력 제고라는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경기가 위축되면 선주사들의 금융 조달이 어려워져 시황이 악화될 수 있어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명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정책팀장은 “국가부도 위험이 높거나 경쟁력이 약한 일부 신흥국 위기에 대한 수출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한다. 외환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고 위험 국가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해 나갈 때”라고 말했다.
장윤정 yunjung@donga.com / 세종=홍수용 / 이건혁 기자
박형준 lovesong@donga.com·강유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