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는 정치 선진국 미국도 다르지 않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전히 최고의 화제를 몰고 다니는 도널드 트럼프가 6개월 가까이 공화당 대선 선두 주자를 유지하는 것도 결국 그의 말 때문이다. 새(鳥) 둥지를 연상케 하는 그의 헤어스타일이나 도금 처리한 전용기가 트럼프 돌풍의 본질은 아니다.
트럼프 화법은 흔히 막말, 거친 언사 등으로 인식되고 있다. 공화당 토론회를 진행했던 폭스뉴스 여성 앵커가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을 하자 “다른 곳에서 피가 났을 것”이라며 생리 현상을 연상하게 해 사람들을 경악시킨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미 정가에서 두루 존경받는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을 “전쟁 (포로였지) 영웅이 아니다”고 했고, 최근에는 ‘이슬람국가(IS)’ 테러 위협과 관련해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막아야 한다”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요즘 미 언론과 학계는 트럼프가 내년 2월 예비경선까지 선두를 유지할 조짐을 보이자 ‘트럼프 언어’의 정체를 분석하고 있다. 핵심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틀을 트럼프가 과감히 깨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줄여 PC로 불리는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 차별, 종교적 편견 등을 금기시하는 일종의 사회문화적 운동으로 지난 20∼30년간 미국에서 보편적 불문율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히스패닉, 무슬림 관련 발언을 해 왔고 공화당 지지자들이 여기에 열광하고 있다. 트럼프 본인도 “내 말이 종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16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고 할 정도다.
트럼프가 작정하고 이러는데도 지지자들이 환호하는 것은 단순히 워싱턴으로 상징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 이상의 차원이라는 해석이 많다. 뉴욕타임스는 “개인 안전, 경제적 기회에 대한 불안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화법이 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먹고살기 어려워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타인 감정에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는 현대 미국 중산층 이하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착한 사람 코스프레(분장)’를 하는 데 지친 그들을 비집고 들어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속 시원한’ 화법으로 정치적 폭발력을 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현상이 미국에만 국한될까. 내년 총선, 후년 대선을 앞둔 한국도 정치, 경제 등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어 국민들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미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다.
정치권의 말과 분위기도 서서히 거칠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국회를 비판하더니 16일엔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제쳐두고 무슨 정치개혁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하대하듯 꾸짖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일제히 박 대통령을 공격하면서도 안철수 의원 탈당 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중지란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열 받은 국민들을 달래주겠다며 ‘한국판 트럼프’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