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갈등 푸는 노인의 품격]<中>어른들의 속마음 들어보니 “귀 잘 안들려 목소리 커지는 것”… 입장 바꿔보면 끄덕끄덕
10월 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에서 경기 의정부시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 열차. 노약자석이 가득 찬 상태에서 한 노인이 일반석에 앉은 20대 남성의 머리를 우산으로 내리쳤다. 머리를 맞은 최모 씨(22)는 그 자리에서 노인 이모 씨(73)를 경찰에 신고했고 이 씨는 동묘앞 역에서 붙잡혔다.
경찰 조사에서 이 씨는 “자리를 양보 안 하는 젊은것이 싸가지가 없어 때렸다”고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지하철에 “어른이 서 있으면 자리를 양보해야지”라고 고함치다 최 씨가 쳐다보자 “뭘 째려보느냐”며 우산으로 때렸다. 최 씨는 이런 이 씨의 폭행에 대응하지 않고 바로 신고했고 합의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씨는 폭행 혐의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는 ‘싸가지 없는 젊은것은 때려도 된다’고 보는 노인 세대의 가치관과 오히려 이런 생각이 문제라고 보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니까…”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관악구 강남구 일대에서 노인 35명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부분 매너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 낯설다고 털어놓았다. 이기범 씨(77)는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말만 들었지 줄서기처럼 서양식 교육은 따로 받아본 적이 없다”며 “할아버지들은 밖에 많이 나갈 일도 없으니 배울 필요를 못 느낀다”고 했다. 손인철 씨(80)는 “예전 교육에선 윗사람이 항상 먼저였는데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노인들은 배려하지 않고 다 일렬로 서 버리는 게 질서라고 한다. 평생 장유유서로 예절교육을 배운 노인들에겐 그런 게 와 닿지 않는다”고 했다.
신체적 제약 때문에 젊은이들을 배려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김모 씨(81·여)는 “우리들은 뿌리 없는 나무다. 할머니들 중에 다리수술 안 한 사람이 있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서 있으면 쓰러질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김옥심 씨(84·여)도 “내가 봐도 할머니들이 막 제치고 앞서 나가려 할 땐 민망하지만 나이가 들면 나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고 했다.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말을 한다는 지적에 대해 김형인 씨(80)는 “귀가 먹어 이야기를 크게 할 수밖에 없는데 젊은 사람들이 핀잔을 주는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물건을 사러 가도 잘 설명해주지 않고 자기들 하는 식으로 해버리니까 자책감과 소외감이 든다”고 덧붙였다.
굴곡진 현대사를 겪은 노인들이 보상심리 때문에 난폭한 행동을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현규 씨(85)는 “6·25전쟁, 월남전에 다 참전하고 대동아전쟁까지 겪었다”며 “내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가유공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며 “그것만으로 예우를 받으려는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했다.
노인부터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용혁 씨(75)는 예의범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며 “요즘 시대에 줄을 서서 공공장소에 들어가는 게 예의라면 따라야 한다. 노인들도 젊은 시절이 있지 않았나”라고 했다.
○ 부모와 생활한 젊은 세대… 노인 이해 노력해야
전문가들은 핵가족화로 젊은 세대가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게 됐지만 노인들은 주로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조부모와 떨어져 생활한 젊은 세대들이 노인의 가치관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여론조사에서도 가족 구성이 2대인 응답자의 58%가 우리 사회의 노인 세대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본 반면 3대 이상이 함께 사는 대가족 구성원은 52.2%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과거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노인들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김형래 시니어 파트너즈 상무는 “이 세대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부 노인들이 권위적 행동으로 보상받으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의 결론은 세대 간 서로를 이해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중교통 노약자석을 젊은 세대는 ‘사회적인 선의’라고 생각하지만 노인들은 ‘당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회질서에 대해 세대 간 합의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경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고령사회연구센터장은 “젊은 세대가 다른 연령보다 유독 노인이 튀는 행동을 했을 때 부정적 태도를 갖는 측면이 있다”며 “시니어 매너 교육도 좋은 시도지만 젊은 세대에도 노인에 대해 이해를 증진시키는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민 kimmin@donga.com·박훈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