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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복음을 ‘동네방네’ 전하는 방법입니다”

입력 | 2015-12-23 03:00:00

낭독공연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 연출 유환민 신부




귀찮아서 빡빡 민 헤어스타일 때문에 가끔 ‘스님’이라는 말도 듣는다는 유환민 신부. 21일 서울 명동 대성당에서 만난 그는 “교회에 오지 않는 분들, 올 수 없는 분들에게 좋은 연극을 통해 복음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가톨릭 신부가 연극을 연출하는 것도 신기한데, 부조리극을 연출한 건 좀 부조리하지 않나?’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차장 유환민 신부(44)의 연출작 목록에 대표적 부조리극 작가 이오네스코의 ‘왕, 죽어가다’가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1998년 사제 서품을 받은 유 신부는 ‘동네방네’라는 극단을 이끌고 있다. 음악, 미술 등 예술을 하는 신부님들이 적지 않지만 연극은 아무래도 특이하다.

24, 25일 각각 서울 명동대성당과 방배동성당에서 열리는 낭독공연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를 연출하는 그를 21일 명동성당에서 만나봤다.

“‘왕, 죽어가다’는 이오네스코가 말년에 며칠간 병으로 거의 죽다 살아난 뒤에 쓴 작품이거든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해 허둥대는 왕의 모습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유 신부는 “2012, 2013년 가톨릭에서 망자(亡者)들을 위해 기도하고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성월인 11월에 공연한 작품”이라며 “충분히 종교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극을 공부하려고 2003∼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을 다녔다. 주변의 시선은 어땠을까.

“‘신선한 발상이고, 가톨릭에 필요하다’고 격려해주신 분들이 있어 교구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는 반응이 일반적이었어요. 교구에 신부가 많아지더니 ‘별놈’이 다 있구나 하는 말도 들었고요.”

유 신부가 처음 연극을 시작한 건 가톨릭대 신학대를 다니던 중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연극은 복음을 ‘동네방네’ 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10∼15세기 가톨릭에서 연극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하는 수단으로 성행했다”며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을 만나는 데도 연극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제 유 신부는 성극(聖劇)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철거민을 소재로 한 ‘없는 사람들’, 6·25전쟁 당시 배달되지 못한 병사들의 편지를 다룬 ‘달아나라 편지야’ 등을 2011∼2013년 연출했다. 내년에도 가톨릭 순교자에 관한 작품과 구한말 신극을 하는 이들을 소재로 한 ‘한낮에 혼령처럼’을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 중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적 가치를 발견하는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부가 한예종에 들어갔으니 한예종이 선교의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아, 이 얘기가 보도되면 혼나겠는데”라며 재학 당시 주변인들에게 세례 받으라고 권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평소 유 신부를 ‘형, 오빠’라고 부르다 신자가 된 연극인이 1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유 신부가 이번에 공연하는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는 기독교의 오래된 전설로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한 동방박사가 준비했던 보물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모두 쓰고 헌신한다는 이야기다. 올해 결성된 서울가톨릭연극협회 회원인 배우 최주봉 등이 출연한다.

성탄절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유 신부는 답 대신 극중 대사 한 구절을 소개했다. 뒤늦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난 네 번째 동방박사가 ‘주님께 드릴 선물이 없다’며 탄식하자 하늘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들아, 이렇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