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경제부 차장
이 정도 상황이라면 암이 퍼지기 전에 수술을 해서 위기의 싹을 잘라 버리는 개혁을 진즉에 단행했어야 한다. 하지만 수술을 맡은 이들에게 세상일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살갗이 곪는 것도 아닌데 왜 벌써 상처를 도려내야 하냐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저항이 길어지자 최근 관료 사회에서는 “차라리 위기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막상 위기가 닥쳐야 개혁을 거부할 명분이 사라진다는 뜻에서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은 “뭔가 일이 터져야 정신을 차리는 한국은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자조(自嘲) 섞인 진단을 내리고 있다.
위기에 대한 경고가 현세의 낙관론에 압도당하는 것은 20년 전도 마찬가지였다. 외환보유액이 바닥나고 시중은행의 달러화가 연일 빠져나가며 나라가 곧 결딴이 난다는 것은 외환 담당 관료 중에서도 극히 일부 핵심 라인만 알고 있었다. ‘선진국 클럽’ 가입 이듬해에 경제부처 장차관들이 “우리 경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쳤고, 상대적으로 한국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지켜보던 외신들조차 믿고 넘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무슨 경고를 한들 그게 먹히기나 했을까. 아마도 “파티의 여흥을 깬다”는 소리만 들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뒤 ‘외환위기 20년’이라는 제목의 기획물을 모든 언론이 토해낼 때 우리는 ‘그때 잘했어야 했다’는 때늦은 후회를 쏟아낼지도 모른다. 남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제 스스로 하는 개혁은 그만큼 어렵다.
내년은 한국이 다시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는 해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중국의 경기 둔화라는 강한 외부 자극이 동시에 몰려오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대로라면 우리는 이번에도 재벌 한두 곳이 쓰러지고, 빚을 못 갚아 집을 내던진 이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때쯤에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팔팔 끓기 전에 다리 근육을 키워 하루라도 빨리 냄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한 대가가 얼마나 쓰라린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