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귤은 귀한 과일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쓰시마 섬, 제주도의 귤이 개성으로 올라온다. 고려 선종 2년(1085년) 2월에 “쓰시마에서 감귤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동사강목). 조선 태종 18년(1418년)에는 일본 쓰시마 좌위문대랑이 황감(柑子·감자) 320개를 바쳤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벼슬 이름(좌위문대랑)과 감귤의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귤의 종류를 금귤, 감귤, 청귤, 유감, 감자, 유자 등으로 상세하게 나누고 그 맛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귀한 과일이니 귀하게 사용했다. 고려 말 도은 이숭인(1347∼1392년)은 팔관회에 참석해 “자줏빛 술을 귤배(橘杯)에 부어 마시니, 그 향기가 자리에 가득하다”(도은집 3권)라고 노래했다. 귤배는 귤을 반으로 가른 껍질이었을 것이다. 귤 껍질로 술잔을 만들어 그 향기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문신 성현은 시에서 “(귤 껍질은) 고기와 같아서 씹으면 단맛이 나고, 꿀에 재워 음료로, 술로 빚어서 마셔도 향과 맛이 뛰어나다”라고 노래했다. 마른 귤 껍질(陳皮·진피)을 이용한 차는 조선시대 내내 주요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궁중에서도 귤 껍질에 인삼을 더한 삼귤차(蔘橘茶)와 생강을 더한 강귤다(薑橘茶) 등을 늘 가까이 두었다.
성종은 늦은 밤, 홍문관에 있던 문신 성희안에게 술과 귤을 하사한다. 성희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소매 안의 귤이 떨어진다. 다음 날, 성종이 성희안을 불러 귤을 한 쟁반 내린다. “어젯밤 그대 소매 속의 귤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리라. 그 때문에 다시 주는 것이다.”(해동잡록 4권)
정작 귤의 산지인 제주도는 고통이 심했다. 세종 9년(1427년) 6월, 제주도 찰방 김위민이 상소를 올린다. 귤 관련 제주 관청의 악행이다. “귤나무를 일일이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기록한다. 그 집 주인이 귤을 따면 절도죄로 몬다”라고 했다. 세조 역시 “민가의 귤 하나하나에 표지를 달고, 손실이 나면 다른 물품으로 세금을 걷는다. 너무 힘드니 민가에서 귤나무를 뽑아 버리는 일도 있다”(세조 1년·1455년)라고 했다. 견디다 못 한 제주 사람들이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를 죽이는 일도 잦았다.
궁중에서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태종 12년(1412년)에는 조정 관리를 제주로 보내 감귤나무를 전라도 순천 등 바닷가 마을에 옮겨 심게 했고 이듬해에도 감귤나무 수백 그루를 전라도 바닷가에 옮겨 심었다. 그러나 실패. 20여 년 후인 세종 20년(1438년)에는 ‘강화도로 옮긴 귤나무’ 이야기가 등장한다. 추운 지방이니 보온이 필요했다. 높이가 10척이 넘는 나무를 구해서 집을 지었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 귤나무를 보호했다. 이듬해 봄에는 또 이 집을 허물었다. 귤나무는 제대로 자라지 않고 민간의 근심거리만 늘어나니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귤은 향기롭지만 귤을 얻는 방법은 힘들었다. 귤을 운반하던 관리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로 가거나 심지어는 중국으로 표류해 쑤저우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5개월이나 늦었으니 공물 청귤은 다 상했다(왕조실록 정조 2년·1778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