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흙수저 과장됐지만, 젊은이의 예민한 인식 담겨 ‘응답하라 1988년’과 달라진 오늘… 교육과 취업에도 계층간 칸막이 “공부 잘하면 정승도 될 수 있다” 이런 꿈이 사라지면서 패망한 조선처럼 될 것인가
송평인 논설위원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응답하라 1988년’의 시대는 지금과 달랐다. 그때도 빈부 격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느끼는 격차라는 게 기껏해야 나이키(Nike)를 신느냐 짝퉁 나이스(Nice)를 신느냐 정도였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전까지만 해도 취업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뉘 집 자식은 좀 나은 회사에 취직하고 뉘 집 자식은 좀 못한 회사에 취직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사촌이나 이웃이 잘돼서 배 아픈 건 있었지만 좌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꼭 재벌의 자녀여서 금수저가 아니다. 작은 문구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한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자식이 있는데 공부를 안 해 고민이라면서 시원찮은 대학에 가면 졸업이나 시킨 뒤 자기 회사에 나와 돕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상위권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 세상에 수십 군데 취업원서를 내보다가 안 될 경우 비빌 언덕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나이키와 나이스의 차이와는 비교가 안 된다.
지금은 교육 기회가 평등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영어 능력에는 외국 생활 경험이 결정적이고 기타 사교육에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로스쿨을 둘러싼 ‘현대판 음서제’ 논란은 교육의 기회뿐 아니라 취업의 기회마저 불평등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반영한다. 윤후덕 신기남 의원의 사례를 로스쿨만의 문제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취업문이 좁아지자 부모가 자녀의 취업에까지 개입하는 더 일반적인 현상의 특수한 사례로 봐야 한다.
18세기 조선 영조 때 유수원이란 실학자가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본래 천민이 아닌 한 누구나 벼슬아치가 될 수 있는 사회로 15세기 건국 초에는 시골구석에서도 명신(名臣)과 재상(宰相)이 많이 나왔으나 16세기 후반 벼슬아치의 세습성이 높아지기 시작해 17세기에 이르러 양반 중인 평민의 계층구조가 확립됐다. 한영우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2013년 ‘과거, 출세의 사다리’란 책에서 과거 합격자들의 명단인 방목(榜目)을 분석해 유수원의 지적을 통계적으로 증명했다.
유수원은 조선 사회의 세습성이 높아지기 시작한 전환점을 사림이 뿌리내린 명종∼선조 때로 봤다. 조선 건국으로부터 160년 정도가 흘렀을 때다. 그때는 퇴계와 율곡이 활약한 유교 문화의 전성기였다. 사림이 표방한 도덕정치의 이상(理想)은 높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 속에서 불평등이 자라고 있었다.
조선 시대 향교는 농사철에는 방학을 하고 추수 뒤에 개학을 했다. 향교에 입학하면 관비(官費)로 배우므로 학비가 필요 없었다. 조선 초기 젊은이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 전 교수는 주장한다. 서원의 설립은 사림이 중심이 돼 유교 교육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인 개혁이었으나 거기서 공부하려면 쌀 수십 가마니를 갖다 줘야 했다. 한미한 집안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꿈이 사라지면서 조선은 패망으로 이끌려 갔다는 분석이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