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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암 조직으로 신약 개발?”

입력 | 2015-12-30 14:00:59

셔터스톡


주부 A씨는 최근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의료진으로부터 “제거한 종양 조직을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보통 유방암은 진단 뒤 먼저 수술을 하고 항암제와 방사선 등을 추가적으로 활용해 치료한다. 하지만 A씨의 경우 종양이 커서 이를 줄이기 위한 항암 화학요법을 먼저 진행한 상황이었다. 의료진은 “해당 치료가 종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려는 것”이라며 동의서 양식을 건넸다. 해당 서식에는 A씨가 연구를 위한 ‘인체유래물’ 제공에 동의하는지, 동의할 경우 해당 인체유래물을 활용하는 연구 범위를 ‘당초 설명한 목적과 유사한 범위’로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포괄적 연구’까지 허용할 것인지 등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인체유래물은 ‘인체로부터 수집하거나 채취한 조직, 세포, 혈액, 체액 등’을 가리키는 말(생명윤리법 제2조 제11호). A씨의 신체에서 떼어낸 암 조직이 바로 인체유래물이다. 이로부터 분리한 ‘혈청, 혈장, 염색체, DNA, RNA, 단백질 등’도 역시 인체유래물에 속한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최근 이를 활용한 연구가 크게 늘고 있다. 김한겸 고려대 의대 병리학과 교수는 “미국 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유방 조직과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건 자신이 해당 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암에 걸릴 확률은 어느 정도인지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며 “이러한 지식은 상당 부분 인체유래물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특히 정확한 진단 및 치료법, 맞춤형 신약 개발 등의 과정에서 인체유래물 연구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추세라고 한다. “앞으로 생명과학 연구와 의약품 개발의 경쟁력은 인체유래물 확보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게 김 교수의 의견이다.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각종 인체유래물이 생겨나는 병원은 이를 확보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이에 따라 최근 질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다 인체유래물 기증을 제안받는 환자가 늘고 있다.

“당신의 유전체를 보관합니다”2013년 전부개정된 생명윤리법은 연구 목적으로 인체유래물을 보관할 경우 반드시 제공자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한다. 이때 연구 목적과 보유 기간 등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야 한다. 그러나 관련 설명을 듣는다 해도 환자가 인체유래물 제공에 대한 의사를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A씨는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암세포가 폐기되지 않고 연구실로 옮겨진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모르게 불편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암 조직 기증’에 동의했다. “앞으로 계속 치료받아야 하는 선생님에게 ‘싫다’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A씨는 “추가적으로 피를 뽑는다거나 별도 처치를 받아야 하는 거면 모를까, 어차피 떼어내야 하는 걸 연구에 쓰겠다는 데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A씨 말처럼 현상적으로 보면 그가 인체유래물 제공 동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입은 피해는 없다. 얻은 이득도 ‘의학 연구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이 ‘동의’가 미래로 이어질 경우, 현재는 알 수 없는 피해 혹은 이익이 나타날 수 있다. 2015년 9월 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체리 레인 극장(Cherry Lane Theatre)에서 공연된 ‘자발적 동의(Informed Consent)’라는 제목의 연극은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 소재는 미국 그랜드캐니언 지역에 사는 소부족 하바수파이(Havasupai) 사람들이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와 벌였던 실제 소송이다. 1980년대 후반 이 부족에 당뇨병이 만연하자 해결책을 찾고 싶었던 이들은 애리조나주립대 연구진 측에 혈액 표본을 제공했다. 표본을 연구에 활용하는 데도 동의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문제가 생겼다. 부족원 가운데 일부가 당시 자신들이 제공한 혈액이 다른 연구에도 사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하바수파이 부족의 기원을 탐색하는 연구가 있었는데, 그 결과는 부족의 오랜 믿음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부족원들은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연구진은 “부족원들에게 혈액 표본 사용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유효한 동의를 받았다”고 반박했다. 양자의 다툼 과정에서 결국 대학 측이 손을 들었다. 2010년 하바수파이 부족원 41명은 70만 달러(약 8억 원)와 자신들의 혈액 표본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소송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인체유래물 연구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김옥주 서울대 의대 인문의학교실 교수는 “인체유래물을 제공받을 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연구 내용을 모두 설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이런 문제는 관련 연구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인 만큼 연구자의 윤리의식을 높이고 피험자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다국적 제약사가 주도하는 임상시험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재단법인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 자료에 따르면 서울은 2014년 현재 세계에서 임상시험이 가장 많이 진행 중인 도시다. 임상시험 시행 건수 관련 국가 순위를 봐도 우리나라는 미국, 독일 등에 이어 세계 7위에 올라 있다. 임상시험을 진행 중인 약 가운데 상당수는 항암제다.

의학기술 진보와 인권 보호식품의약품안전처 분석 결과 2014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인 임상시험 가운데 약 32%가 항암제에 관한 것이다. 최근 다국적 제약사들이 환자의 유전체 정보를 이용한 표적항암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피험자 정보가 관련 연구에 이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한겸 교수는 “최근 개발되는 항암제는 특정 유전자에 작용해 효과를 내도록 설계돼 있어 환자가 어떤 약을 쓰는지를 보면 어떤 유전적 특성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다. 항암제 임상시험에 참여하려면 당연히 자신의 유전체 정보를 제약사 측에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피험자가 임상시험 도중 인체유래물 제공에 동의할 경우 혈액, 조직 등도 다국적 제약사에 축적될 수 있다. 상당수 제약사가 이를 싱가포르, 중국 등으로 가져가 연구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생체정보가 해외에 광범위하게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현재 국내 임상시험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취지로 통합정보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 8월 31일 발표한 ‘임상시험 글로벌 경쟁력 강화 방안’에는 임상시험 통계자료뿐 아니라 질환별 환자 정보, 질환별 임상시험 대상자 정보 등을 통합 공개하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임상시험 참여자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인체유래물의 향후 이용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인체유래물 연구 동의서에는 ‘귀하의 인체유래물 등을 이용한 연구결과에 따른 새로운 약품이나 진단도구 등 상품개발 및 특허출원 등에 대해서는 귀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2007년 조류독감이 창궐했을 당시 바이러스 확산의 중심지였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세계보건기구(WHO)에 조류독감 바이러스 표본 제공을 거부한 바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인도네시아인으로부터 획득한 바이러스 표본을 이용해 조류독감 예방백신을 개발하면서 정작 이익은 독점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2010년 10월 일본 나고야에서 ‘유전자원 접근 및 이익 공유에 관한 나고야 의정서’를 채택해 각국이 보유한 생물자원에 대한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대해 김옥주 교수는 “의약산업이 발전할수록 사람을 이용한 연구는 더 늘어날 테고 윤리적 이슈도 많아질 것”이라며 “의학기술 진보와 인권을 조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송화선 기자 jhk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