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
때는 오후 9시경. 파도와 싸우며 상황을 파악했다. 6노트의 속도로 4시간가량 나왔으니 육지로부터 대략 24마일 지점이다. 육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북쪽 바닷물은 몹시 차서 30분 이상 물에 있기 힘들다. 옷을 입었으니 한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육지에서 40km 넘게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한 시간 안에 구조되지 못하면 물고기 밥이 된다.
나는 살 운명이었다. 다행히도 주위에 다른 배가 있었다. 몸이 뻣뻣해질 때쯤 드디어 구조됐다. 그때가 15년 전 9월이었다.
나는 감옥도 7번이나 옮겨다녔고, 총구 앞에도 서 봤다.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는데, 바다에서 죽을 뻔한 적도 몇 차례 된다.
한번은 바다로 나왔다가 육지로 돌아가는 길에 4마력짜리 엔진이 고장 났다. 부두에서 6시간 이상 나온 데다 밤새 배가 흘러 돌아갈 거리는 100km가 훌쩍 넘었다. 먼바다는 빠르게 흐른다. 쪽배는 강물에 흘러가는 듯하다. 걸어가도 이틀 걸릴 거리를 꼬박 노를 저어 돌아왔다. 뱃가죽이 등에 붙고, 하늘이 노랗게 변해도 살 생각뿐. 땅을 디디고서야 쓰러졌다.
대학 때 나는 여름 방학마다 배를 탔다. 대학 생활에 드는 돈을 얼마라도 벌기 위해서였다. 쪽배에서 나는 김일성대 학생이 아닌 일개 ‘삯발이’, 즉 삯일꾼이었다. 카바이드등을 켜고 새벽까지 잡은 오징어의 70%를 배 주인에게 주어야 했다. 8, 9월 오징어 성수기엔 바닷가에 삯발이가 넘쳐난다. 연줄이 없으면 4m 정도의 작은 쪽배를 얻어 타기도 힘들다.
망망대해에서 쪽배는 가랑잎이다. 갑자기 큰 파도가 일면 높은 마루 위에 올랐던 쪽배가 깊은 골로 뚝 떨어지는 일을 밤새 겪어야 한다. 발밑에선 널빤지가 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금시라도 쪼개질 듯 부르르 떨고, 머리 위엔 사방팔방 검은 파도의 성난 흰 갈기밖에 보이지 않는 때면 ‘오늘이 제삿날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북에선 오징어잡이를 ‘피발이’라고 부른다. 3개월 가까이 하루 서너 시간만 자면서 밤새 고역을 하다 보니 피가 마른다고 붙은 이름이다. 그래도 살아남기만 하면 다행이다. 우리 마을에선 매년 열 명 이상 죽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들어보니 북한 바닷가엔 여성만 모여 사는 과부촌도 적잖게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쯤이면 그럴 만도 하다.
최근 일본 앞바다에서 표류하던 북한 어선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자주 나왔다. 올해만 34척 이상 발견됐다고 해 놀랐는데 알고 보니 지난해엔 65척, 재작년엔 80척이 발견됐다고 한다. 내가 배를 탈 때는 그렇게 많이 죽었어도 일본까지 배가 표류해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는 평균 5시간 배를 타고 나왔는데, 지금은 어업자원이 줄어들어 10시간은 나오지 않나 싶다. 멀리 나올수록 더 위험해진다.
북한 앞바다에서 표류하면 극히 일부가 해류를 따라 부산과 일본 사이까지 떠내려왔다가 일본 서해안을 타고 올라간다. 일본에서 발견된 변사체들은 오징어잡이에 나섰다가 두 달 전쯤 조난당한 삯발이가 대다수일 것이다. 그들도 독도 인근 해상을 표류할 때쯤까진 살아 있었으리라. 북한은 일본까지 간 자국민의 시신을 찾아갈 생각도 안 한다.
나의 공포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동해의 비극은 언제면 끝날 수 있을까. 난민이 넘치는 지중해에서만 벌어지는 줄 아는 그런 참사가 바로 우리의 눈앞 동해에서 20년 넘게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최소 1만 명의 동포들이 비명도 전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숨졌다.
새해엔 좀 그만 죽었으면….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인 줄 나도 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