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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변영욱]기자의 존재 이유

입력 | 2015-12-31 03:00:00


변영욱 사진부 차장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 현장은 긴장을 놓지 않은 기자가 있었기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죽음을 결심한 사업가 출신 정치인과 새벽 통화를 한 기자가 있었기에 세상에 알려졌다. 탈당한 안철수 의원은 서울 마포에 사무실을 내면서 100개의 의자를 구비한 기자실을 만들었다.

기자 직군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공존한다. 다만 이 사례들만 보더라도 기자들은 이 사회에서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자와 공권력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건강하고 예측 가능한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 각종 비리를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것은 기자들의 몫이다.

이달 초 경기 부천시 원미구의 한 마을에서 엽기적인 사기 사건이 일어났다. 한 무면허 복덕방 여주인이 서민 40여 명에게 월세 계약 주택을 전세라고 속여 36억 원가량의 전세보증금을 받아 가로채고 투자금 명목으로 수십억 원의 돈을 빌려 달아난 ‘부천 투자·전세 사기 사건’이다. 신고 1주일 만에 경찰에 잡힌 여주인 명의의 은행 계좌는 모두 비워져 있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사기 행각의 피해자는 대부분 셈에 약하고 싼 집을 구해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사기 사건이 일어난 곳은 1987년 양귀자가 펴낸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무대가 되었던 곳에서 약 1.5km 떨어진 동네다. 양귀자는 28년 전 서울 외곽의 이 동네에 대해 “한국 사회의 부박한 삶과 그 진행의 현상이 축약되어 있음을 실감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고 썼다. 당시 독자들은 차별과 황량함의 원인을 야만적인 정치 사회적 환경에서 찾았다.

2015년 겨울은 어떤가. 그 동네에서 고단한 삶을 버티던 서민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십수 년간 동네에서 언니 동생 하며 살던 복덕방 여주인에게 사기를 당한 사실을 확인한 피해자들은 황망해했다. 자기 얘기를 들어줄 기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부천 상황이 좀 묘했다. 2008년에 부천에 상주하던 지역 기자들끼리 관급 광고를 둘러싸고 분뇨를 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 여론의 뭇매를 맞은 기자단이 해체됐다. 최근 소수의 기자가 부천에 다시 상주하긴 하지만 지자체 공무원이 긴장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는 평이다.

피해자들은 인천에 주재하는 기자들이 쓴 몇 꼭지 기사에 붙은 누리꾼 댓글에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없는 사람들에겐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말이다.

기자는 귀찮은 존재다. 묻고 따지고 아무 때나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하지만 기자가 없으면 속으로 곪아가는 세상을 보여줄 수 없다. 부천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서민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들어줘야 한다면, 기자가 아닐까. 그러기에 기자의 삶이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

변영욱 사진부 차장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