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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찬의 SNS 민심]새해로 걸어온 ‘불가역적 합의’

입력 | 2016-01-01 03:00:00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이 명단은 생명부요. 가장자리 여백이 죽음의 폭풍을 막아주는 방패죠.”

스티븐 스필버그의 1993년 걸작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대사다. 쉰들러는 폴란드에서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써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던 유대인 1100명을 구했다. 전쟁을 틈타 떼돈을 벌겠다던 기회주의자가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인류애를 끄집어내 역사의 한 물줄기를 바꾼 감동적인 사건이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김수영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2015년 5월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역사에 종지부는 없다”고 선언했다.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가 세상을 온통 들끓게 했다. 역사는 당대의 당국자 따위가 ‘재론할 수 없는 합의’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안부 논란이 새해를 향해 질주하던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춰 세운 까닭이다. “믿기지 않는 보도네요. 이번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다시 거론해선 안 된다는 문안이 우리 정부가 넣은 것이랍니다”라고 쓴 @187c****의 트윗은 3762건 리트윗됐다. 역사에 대해 정부가 해야 할 일과 민간이 하는 일이 따로 있음을 정부는 몰랐을까. 소녀상 문제나 유네스코 유산 등록과 같은 일은 숭고한 민간의 노력이다. 지금 소셜미디어에서는 소녀상 지키기 무한 RT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Brun****이 올린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 소녀상까지 치운다고? 소녀상은 우리 힘으로 지켜냅시다”라는 글은 4671회의 리트윗을 기록해 위안부 관련한 글 가운데 가장 멀리 퍼졌다.

12월 28일부터 31일 오전까지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에서 위안부를 언급한 글은 모두 31만5104건이 검색됐다. 메르스 사태 이후 최고 언급량이다. 통상 ‘새해’ 관련 언급량은 이듬해 1월을 향해 가파르게 치솟는데 29, 30일 양일엔 새해 언급량이 전일에 비해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마저 연출됐다. 그만큼 이번 위안부 합의가 준 충격이 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론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긍정·부정 연관어를 보면 1위부터 피해, 굴욕적, 범죄, 졸속, 상처 등이 올라 부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이었음을 드러냈다. 이해를 구한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긍정어 분포는 16.1%에 그쳤고 부정어 분포는 64.8%를 기록했다. @hyem****은 “위안부 할머니들 아픔은 이해하지만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반응은 미미했다.

위안부와 함께 언급된 전체 연관어를 살펴보면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전 이해를 구하지 않은 정부의 굴욕적 협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위는 정부, 2위는 할머니, 3위는 (굴욕적) 협상, 4위는 박근혜, 5위는 아베가 차지했다. @sear****는 “위안부 할머니가 외교부 고위 공무원에게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따지시는데 아무 대꾸도 못 한다. 도대체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건가”라고 개탄한 트윗은 1326회의 리트윗을 기록했다.

전체 연관어 6위는 피해자, 7위는 일본군이었고 8위는 돈이 차지했다. 실제로 소셜미디어에는 10억 엔을 조롱한 글이 가장 많이 퍼졌다. 푼돈으로 역사를 훼손했다는 지적이다. 기시다 후미오 외상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의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일본 기자들에게 “우리가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고 했다는 소식도 널리 퍼졌다. 이번 협상에서 정부가 섣불리 돈을 끌어들인 점은 국민적 자존심에 심각한 생채기를 남겼다. @kyun****은 “조국을 거지꼴로 만들었다”는 의견을 올렸다. 정치권의 공방도 트위터를 통해 퍼졌다. 전체 연관어 9위엔 외교, 10위엔 소녀상이 올랐다.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 해결의 ‘가장자리 여백’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 할머니들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갑질이 아니라 사죄를 해야 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일방향의 이해를 구하기보다 할머니들의 한을 진심으로 껴안아야 할 것이다.

그들만의 합의와 반대로 ‘불가역적 시간’이 새해로 걸어왔다. 문제가 한꺼번에 풀리지는 않겠지만 역사의 아픔을 진심으로 껴안는 국민적 지혜가 절실하다. 미래는 거기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엔 모두에게 더 밝고 따뜻한 이야기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