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반정부 시아파 지도자를 포함한 테러 혐의자 47명을 한꺼번에 처형함에 따라 새해 벽두부터 중동 내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갈등이 다시 불붙었다.
사우디 정부는 2일 이란 이라크 등 시아파 국가가 사면을 요청한 사우디의 시아파 지도자 셰이크 님르 바크르 알님르의 사형을 집행했다. 알님르는 2011년 아랍의 봄 시위 때 사우디의 소수 시아파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됐다. 사우디에서 시아파는 인구의 15%밖에 안 된다. 사우디가 지난해 만든 법에 따르면 개혁을 요구하거나 부패를 폭로하는 반정부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테러범으로 처형할 수 있다.
시아파와 충돌이 뻔한데도 사우디가 알님르의 처형을 감행한 것은 최근 사우디를 둘러싼 ‘위기론’을 잠재우려는 결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사우디 알사우드 왕가는 유가 급락과 예멘 내전의 장기화로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 인근 이란과 이라크 바레인 레바논 등 ‘시아파 벨트’에 미치는 정치외교적 파장보다 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엄단하는 의지가 우선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란 외무부는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대리를 불러 강력히 항의했고, 사우디 정부는 “내정 간섭 말라”고 맞섰다. 일부 언론은 이란이 보복조치로 자국 교도소에 수감된 수니파 성직자 20여명을 처형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시아파가 정권을 잡은 이라크에서도 지난해 25년 만에 개설한 사우디 대사관을 다시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조직 헤즈볼라는 성명에서 “알님르 처형은 암살이자 추악한 범죄”라며 “사우디 체제를 보호하는 미국과 그 동맹들도 책임이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다.
영국 BBC는 “사우디는 중동지역에서 시아파의 세력을 확대하는 이란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며 이번 사건의 배경을 분석했다. 사우디와 이란은 수년째 이어진 예멘과 시리아 내전에서 서로 다른 종파를 지원해 결과적으로 내전을 부추겼다. 또 사우디는 지난해 서방과의 이란 핵협상 당시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에 반대하기도 했다.
중동의 대국인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격화하자 서방국도 우려를 표했다. 미국 국무부 존 커비 대변인은 “사우디는 종파 갈등과 긴장 완화를 위해 중동지역의 모든 공동체 지도자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에서 “사우디의 인권을 무시한 47명 집단처형에 경악한다”고 유감을 표시하고, 사우디 대사관을 공격한 이란 시위대에는 자제를 촉구했다.
파리=전승훈특파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