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서거 뒤 스러진 개혁정치, 보수의 반동 때문이었다고? 개혁군주가 키운 최측근 ‘시파’… 정권 탈환 뒤 초심 잃고 낡은 관념과 특권에 안주했다 노무현이 키운 친노 386… 낡은 관념과 특권 놓고 떠나라
김순덕 논설실장
‘이따금 단 한 해 만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토대가 바뀌는 것 같다. 서양에서 1776년은 그런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는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의 건국과 ‘국부론’이 나온 그해부터 동양을 제치고 서양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거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서양이 그 후 200여 년간 지금까지의 경제성장을 다 합친 것과 비교되지 않게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같은 해 개혁 군주가 나타났다. 그런데 왜 그로부터 100년도 안 된 1871년 우리는 신미양요로 미국에 강화도를 점령당하고 개항을 강요당해야 했나.
이런 내러티브 때문인지 노 정부 시절엔 유독 정조 관련 책과 드라마,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대통령에게 “개혁정치를 했고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조와 닮았다”고 했다는 말이 보도되기도 했다(본인은 “그게 아니라 ‘정조를 좀 배우십시오’라고 말했다”고 공개 해명). 국회나 청와대로 간 386운동권은 북학파 같은 개혁적 신진세력으로 묘사됐다. 심지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2년 대통령선거 출마 선언문에서 “정조대왕은 ‘위에서 손해를 보고 아래가 이득이 되게 하라. 그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라고 했다”며 자신의 복지정책에 정조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정조 서거 뒤 보수적 노론 벽파가 반동적 정치를 편 건 사실이다. 하지만 1806년 이들을 일망타진하고 60년 장기집권에 들어간 세력은 바로 정조가 키운 노론 소론의 시파 관료학자였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를 열었던 사돈 김조순은 물론이고 세도정치의 주역 모두 정조가 가장 아꼈던 최측근이라는 것이 유봉학 한신대 교수의 연구결과다.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기득권 계급이 되자 관념과 특권, 향락에 빠졌을 뿐이다. 문제 해결 능력은커녕 개혁의지나 위기의식도 없어 순조가 삼정문란을 걱정하면 “임금이 검소의 모범을 보이면 된다”는 식이었다니 배신감을 느낄 정도다.
2007년 정조시대를 그린 소설 ‘방각본 살인사건’을 낸 김탁환은 “백탑파(북학파)가 보수세력의 방해를 뚫고 규장각에 들어가 제 역할을 한 것처럼 386세대 정치인도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를 빈다”고 서문에 썼다. 노 정부 때 청와대와 국회에 대거 입성했던 86그룹이 무슨 역사적 소임을 다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을 잃고 아직 탈환도 못했는데 비례대표 의원이 대리기사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위세를 부리는 정당이 더민주당이다. 정조의 측근들이 정조의 개혁을 굴절시킨 것만 봐도 이들이 다시 표를 얻어선 안 되는 이유가 또렷해진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정당을 ‘더 민주’라는 약칭으로 써야 하는 현실이 분할 정도다.
문재인 대표나 더민주당이 친노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자신들만 개혁이고 진보라고 믿는 까닭이라고 본다. 정조의 측근들과 달리 이들은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여서 아직도 자본은 무조건 나쁘고, 노동자는 무조건 약자인 줄 안다. 오죽하면 진보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이들 때문에 야당의 외연 확대가 불가능하다며 “386 ‘창업공신’은 이제 물러나라”고 주장했을까 싶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