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
원 원내대표가 ‘스토커’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이 원내대표를 졸졸 쫓아다닌 끝에 겨우 성사시킨 자리였다. 이 원내대표는 언론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장소’를 원했다. 멀쩡한 국회 원내대표실을 두고 인근 호텔까지 찾아간 이유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이 원내대표는 나타나지 않았다.(이 원내대표는 정치권에서 ‘지각대장’으로 유명하다.) 원 원내대표가 전화를 걸자 이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회의 중이니 다시 국회로 올 수 없겠느냐”고 했다. 여권 인사들은 황당했지만 판을 깰 순 없었다. 원 원내대표는 “다들 기다린다. 빨리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여야 간 공방이 오가던 중 야당이 ‘작전타임’을 외쳤다. 두 사람은 회의실을 나간 뒤 깜깜무소식이었다. 40여 분이 지나 원 원내대표가 이들을 찾아 나섰다. 두 사람은 옆방에서 잠에 취해 있었다. 쌍화탕에 와인까지 곁들였으니 ‘쌍와 폭탄주’ 탓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깨워 늦은 밤까지 협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후 며칠 동안 마라톤협상을 벌인 끝에 비준동의안은 같은 달 30일 통과됐다. 하지만 원 원내대표를 기다리는 것은 ‘황당한 협상’이란 질책이었다. 여당이 야당의 요구를 수용해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1조 원을 마련해 농어촌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비판이었다.
한 고비를 넘겼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한숨은 줄지 않았다. 이젠 경제활성화 법안과 노동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켜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더 꼬였다. 야당의 탈당 사태로 야당 지도부가 사실상 무너졌다. 2일 원 원내대표는 이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쟁점 법안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자 이 원내대표는 “(야권) 통합의 길을 떠나야 한다”고 답했단다. “국회부터 통합하자”는 원 원내대표의 하소연은 메아리 없는 넋두리일 뿐이다.
이제 여당이 기댈 것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밖에 없다. 하지만 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교섭단체 대표들의 합의 등 세 가지 경우에만 직권상정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의 한숨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들리는 원 원내대표는 요즘 별별 상상을 다 한다고 했다.
야당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국회선진화법’하에서 여당 원내대표는 ‘슈퍼 을(乙)’이 됐다. ‘선진화 실험’은 4년이면 족하다. 그러나 기막히게도 모두가 잘못된 걸 알지만 누구도 바로잡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법을 개정하려면 5분의 3(국회의원 총원 300명 중 180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이제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여야가 결자해지 차원에서 스스로 개정을 하든,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도 어렵다면 국민은 여든, 야든 한 당에 180석을 몰아줘야 한다. 현명한 아이는 회초리를 맞기 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