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 독립문까지 뻔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작가 박완서가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묘사한 1951년 1·4후퇴 당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부근의 모습이다. 비현실적으로 들리지만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1학년)에 다니던 작가의 체험담이다.
▷작년 이맘때 한창 흥행했던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 12월 중공군에 밀린 흥남철수가 도입부의 배경이다. 그 직후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기에 앞서 서울시민은 너 나 할 것 없이 피란길에 올랐다. 6·25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 수중에 떨어진 뒤 9·28 수복 때까지 인민군이 저지른 만행과 수복 후의 ‘빨갱이 색출’ 작업으로 고초를 겪은 탓이다. 중공군의 공세로 다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텅 빈 수도를 뒤로한 채 서울시민은 앞다퉈 남행길에 올랐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저서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서 “남한군이 북한군에 패배하였을 때보다 미군이 중국군에 패하여 서울을 내어줄 때의 충격이 더 컸다”고 평가했다. 1·4후퇴는 “큰 제국 미국의 후퇴였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북한 정권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로선 통일 기회가 무산된 데 대한 중국의 역사적 책임을 잊을 수 없다.
▷한국과 중국 국방부의 핫라인이 지난해 12월 31일 개통돼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창완취안 중국 국방부장이 통화하며 협력을 다짐했다. 미국(1995년), 일본(1999년)에 이어 세 번째다. 북한 급변사태 등 유사시 한중 군 당국이 긴급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확보된 셈이다. 65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반전(反轉)이다. 미중의 패권 전략 사이에서 한반도엔 또 어떤 격변이 몰려올지 모른다. 역사의 의미를 무겁게 새겨야 하는 오늘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