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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스물다섯 젊음의 선택, 남극

입력 | 2016-01-05 03:00:00


이어진 대전 서구보건소 의사

세종기지를 떠나던 날도 흐렸다.

1년 전 도착했던 날처럼. 바람이 차갑게 부는 남극 킹조지 섬의 평범한 날씨가 그랬다. 점심밥은 먹고 출발했던가. 옅은 안개로 덧칠된 붉은 기지가 시야에서 차츰 멀어진다.

한여름 시끄럽던 매미소리가 뚝 그친 순간이 그러할 것이다. 수많은 인생 과제와 바쁜 일상을 뒤로한 채 스물다섯 젊음이 덜컥 선택한 남극은, 무엇보다 참 조용한 곳이었다. 하얀 눈을 밟고 기지 뒤로 조금만 돌아가면 원시 지구 태초의 고요가 있었다.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연중 돌아가는 발전기 소리도, 세종기지 앞 메리언 소만의 파도 소리도 사라진 그곳에는, 나와 눈과 바람만 있었다.

눈을 베개 삼아, 바람을 이불 삼아 그 자리에 털썩 누우면, 심장이 멎는 듯 시린 감동이 밀려오곤 했다. ‘내가 정말 남극에 와 있구나.’ 가족들의 얼굴, 친구 선후배들과의 추억이 바람과 뒤엉켜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형은 왜 남극에 왔어요?” 월동대 막내 대원의 질문도 윙윙 귓가를 맴돌았다. 겨울밤을 꼬박 새워 그럴듯한 대답을 짜내다 보면 남십자성과 은하수가 눈이 부셔 자꾸 눈물이 났다.

‘남극의 셰프’ 조리대원은 여기서 한식 세계화에 이바지하고 싶단다. ‘홍일점’ 해양연구대원은 남극바다 미생물에 푹 빠져 있었다. ‘팔방미인’ 지구물리대원은 남극 지진파 자료 수집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고, ‘기지의 심장’ 발전대원은 교체한 발전기의 설치와 관리에 사명감을 이야기했다. ‘베테랑’ 통신대원은 남극 민간외교 수단인 아마추어 무선통신(HAM)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능과도 같은 호기심이 모두를 들뜨게 한다. “궁금하잖아.” “가보고 싶고.” 대원들의 얼굴에는 남극 탐험가 청년 아문센과 청년 스콧, 청년 섀클턴의 모습이 스친다.

남극에 가기까지 준비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궁금했다. 의사가 남극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졸업 후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전공의 수련이라는 고생길(?)을 피해 도망친 것 아니냐는 채찍, 잠도 못 자고 병원에서 애쓰는 동료들의 모습이 생각나면 남극에서도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그래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덜 망설인 것은, 더하기 빼기 등 복잡한 셈법보다는 137억 살 먹은 우주, 45억 살 먹은 지구 덕분이었다.

‘인생이 찰나인데, 불꽃같은 삶을 살아야지(사실 불꽃까지 사용하기에는 세종기지가 생각보다 덜 추웠지만). 뭐 있나, 여기 저마다 살아내는 인생 하나하나가 소중한 예술작품인 것을. 그냥 나도 그들처럼, 함께 한바탕 실컷 놀다 가는 것이다.’

“1)가나다 2)가다 3)나라 4)라 5)가나다라” 비교 또 비교, 선택 또 선택. 5지선다 시험지로 단련된 젊음에게, 남극이 질문을 던진다. 인생도 객관식인가? 그래. 선택의 연속이니 그런 것도 같다. 그래, 그러면 그 선택지를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음, 선택지?

겨우 두 단계 되었는데, 답이 턱 막히고 만다. ‘아하, 그래. 인생이 주관식인 것을, 내가 출제자이고 내가 수험자인 것을.’

온통 흰색뿐인 남극이란 캔버스 한복판, 붉은 기지가 준 은유는 강렬했다. 세종기지야말로 인간의 호기심과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수놓은 한 땀 한 땀이 아니던가.

복기하되, 뒤돌아 후회는 하지 말자. 내가 출제한 시험지이니까, 내가 그린 그림이니까. 선지 하나 더 만들면 되지, 자고 일어나 조금 손보면 되지. 겨울의 길고 숨죽인 고요는 맑은 날 오랜만의 햇빛과 함께 사방으로 부서진다. 흰 눈 도화지 위에 햇살을 받아 더 붉게 스며드는 세종기지.

바람이 어깨를 툭 친다. ‘주관식 인생이다. 잘될 거야. 괜찮다, 걱정 마라.’

겨우내 춥고 웅크린 젊음에게, 칠흑 같은 어둠과 두려움으로 베갯머리 적시던 젊음에게 문득, 저 멀리서 다시….

붉은 옷들이 하나둘 인천공항 입국장 게이트에 등장한다. 1년 임무를 갓 마친 남극기지 월동대원들이다. “고생 많았다. 수고했어, 건강해서 정말 좋다.”

내 마음에도, 그들의 마음에도, 남쪽에 두고 온 여름이 일제히 울기 시작한다.

이어진 대전 서구보건소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