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인간들은 폭죽을 터뜨렸다. 눈금이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지구가 동시에 그 눈금에 얹힌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는 날이 저물고 있는데 어디에서는 새해가 밝았다고 환호성이었다. 시작은 어디고 끝은 무엇인가.
첫 역사서는 그리스어로 쓰였다. 눈금이 없는 상황을 카오스(chaos)라고 칭했다. 어떤 틈에 끼여 분류되지 못하는 상태를 지칭했고 혼돈이라고 번역했다. 분류하는 능력은 로고스(logos)라고 했다. 눈금의 좌우에 만물이 편안히 놓인 상황은 시메트리아(simmetria)였다. 번역하면 조화였다. 구분의 결과가 조화롭지 못하면 그 도구는 로고스가 아니다. 로고스가 없는 눈금과 구분을 강요할 때 그것은 폭력이다.
눈금이 넘어갈 즈음 남쪽에서 자행되는 분류 폭력의 현장이 대학 입시다. 학생들은 인문계, 이공계, 예체능계라는 구분선 안으로 도박패를 던져야 한다. 건축은 이공계로 분류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대학에서 건축학과의 연간 성취는 인문계로, 교수들의 연간 업적은 예체능계로 나눠 평가한다. 그렇다면 이 분류의 배경에 있는 것이 과연 로고스인가.
학생들을 이 이상한 테두리로 나눠 가두고 그 안에서만 선택을 하라는 건 야만적 폭력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 위반이다. 나눈 자들은 편안하겠으되 나뉜 자들은 고통스럽다. 나뉜 자들은 미래의 지구가 아니고 바로 지금 이곳이 불타는 지옥이라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참혹하다. 굳이 나눠놓고 융·복합에 미래가 달려 있다는 국가의 미래는 카오스다. 그 국가의 현재는 희극이다.
지구와 한반도의 미래도 걱정스러우나 내 앞길도 평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어찌 구분이 될까. 나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니 건축과 교수다. 건물을 설계하므로 건축가고 책도 몇 권 썼으므로 저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당황스럽게 건축학자나 건축비평가라고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출입국 카드 작성과 연말정산의 순간에 정부의 분류 기준으로 근로자, 교육자, 예술가, 저술가 중 나는 내가 누구인지 고민했다.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자의 뻔한 모습일 것이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인문계인가, 자연계인가, 예체능계인가. 대학교수도 모르는 것을 고등학생들에게 알아오라는 이 사회의 로고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나는 분류를 거부할 자유를 얻었다. 떳떳하고 뻔뻔하게 전부에 속하기로 했다. 나는 몇 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그 대상은 비닐하우스거나 접고 펴는 구조물이다. 대상이 건물인지를 구분할 필요도, 건축과 교수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물을 필요가 없다. 나는 눈이 오면 무너지는 비닐하우스에 좌절했으며 재난으로 몇 달 기식할 공간이 없는 이재민들의 처지에 애통해했을 따름이다. 고백하거니와 분류되지 않는 나는 분류하기 어려운 이런 걸 디자인하는 순간 행복했다. 새해에는 기꺼이 발명가의 갈래를 하나 더 얻을 생각이다.
로고스는 말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며 그 실체는 의사소통이다. 이 땅에서 칼은 칼이었고 말도 칼이었다. 설득하지 않고 찌르고 내리치려고만 했다. 그 칼, 새해에는 내려놓자.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