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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위안부 합의는 화해 첫발… 과거사 교훈 계속 교육해야”

입력 | 2016-01-06 03:00:00

[세계 석학에게 듣는다]<3>파스칼 보니파스 佛 국제관계전략연구소 소장
“獨, 과거사 인정 없었다면 통일도 유럽연합도 없었을 것… 한중일, 진정한 역사화해 필요”




4일 오전 프랑스 파리 11구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사무실에서 만난 파스칼 보니파스 소장은 “유로화 위기 속에서도 유로화가 죽지 않았듯이 유럽연합(EU)도 난민 사태와 테러의 위기를 뚫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독일의 과거사 인정과 사죄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도, 유럽연합(EU)도 맞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한중일 간에도 실질적인 협력을 위해선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화해가 필요합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자 파스칼 보니파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60)은 4일 동아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최근 한일 간에 이뤄진 ‘위안부 합의’에 대해 양국이 화해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보니파스 소장은 “일본이 과거 한국에 가했던 끔찍한 범죄와 가해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두 나라가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한 번 사죄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과거를 모두 덮어 버려서도 안 된다”며 “자라나는 후손들이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교과서에 기록하는 등 양국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등으로 유명한 그는 유럽과 중동의 국제 관계와 핵문제, 군축 등을 다룬 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현재 파리 8대학 유럽학연구소 교수로 있으며, 글로벌 정치 전략 연구가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전략연감’과 ‘국제전략학술지’의 발행인 겸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와의 인터뷰 장소인 IRIS는 파리 11구의 대로변에 있었다. 지난해 1월 테러가 발생했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 11월에 파리 최악의 인질극 중심지였던 바타클랑 극장에서 각각 8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지난해 프랑스는 끔찍한 한 해를 보냈다”며 “유럽인은 이제 테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적인 합의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양국 여론은 부정적이다. 합의를 이행하고 발전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민족 간의 화해는 시간이 필요하다. 1950년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정치권에서 과거 전범(戰犯) 행위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진정한 화해의 첫 단계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의지가 일반 국민에게도 전해진다. 가령 1950년대에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 되지 않았나.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과거사의 교훈’을 끊임없이 후손에게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에는 양국의 역사가들이 공동 집필한 역사 교과서가 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이 교과서를 함께 발행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독일의 전후 사죄와 보상 노력이 전후 유럽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행동은 유럽인들의 마음을 녹였다. 이후로 프랑스와 독일 간에는 더 이상 적개심이 없다. 이것은 역사의 무게를 뛰어넘은 정치적 의지의, 그야말로 역사적인 예시다. 과거 잘못에 대한 인정이 없었다면 독일은 소련이나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개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독일 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브란트 전 총리는 독일의 전범 행위를 모두 인정함으로써 독일 정부의 외교 영역을 크게 넓혔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위대한 애국자다.”

‘핵의 세계’라는 저서에서 미국과 소련, 중동과 북한 등의 핵무기 전략을 분석했던 보니파스 소장은 유엔 군축자문위원회 위원(2001∼2005)을 지내기도 했다. 그에게 북한 김정은 정권이 이란처럼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는 전략을 쓸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보니파스 소장은 “북한 정권에 핵은 생명보험과도 같은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북한은 패배가 확실시되는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보다는 핵을 보유함으로써 외세의 군사작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은 이라크가 2003년에 핵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미국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새해 벽두부터 시아파 성직자 처형을 계기로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정면충돌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 국가인 양국이 왜 죽기 살기로 싸우나.

“사우디와 이란의 라이벌 경쟁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지속돼 왔다. ‘왕국 대 공화국’ ‘수니파 대 시아파’ ‘아랍인 대 페르시아인’ ‘미국의 최우방국 대 주적’….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7월 14일 서방과 이란의 핵 협상 타결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즉 이란의 핵 무장에 대한 우려는 사라졌지만 사우디는 이 합의로 이란이 중동에서 세력을 확산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걱정스럽다. 두 나라는 시리아, 이라크, 예멘에서 동맹국을 통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은 이미 유가 하락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다.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만한 중재자를 찾아야 한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아랍연맹 등 국제 동맹군의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국제사회의 공습이 IS를 궤멸시킬 수 있다고 보나.

“IS와의 전쟁에 참여한 국제 동맹은 규모는 크지만 각자 속셈은 다르다. 터키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막는 것이 목적이고, 사우디는 이란의 강대국화를 견제하고 싶어 한다. 이란은 시리아에 중요 전략적 거점을 지키면서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목표이고, 러시아는 시리아에 알 아사드 정권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모든 국가가 IS를 제거하기 위해 공습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방 국가나 러시아 혹은 시아파의 지상군 직접 개입은 피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은 IS가 원하는, 가장 큰 함정이다. 지상군 투입은 수니파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가장 유용한 조치는 IS의 주 수입원인 원유 수출을 막아 경제적 생명선을 끊는 것이다.”

―지난해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파리 테러 사건으로 프랑스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프랑스가 집중 타깃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수니파 무장 집단 IS는 프랑스가 말리에 파병해 IS가 그곳을 점령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프랑스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인구의 10%가 무슬림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다. IS는 프랑스에서 ‘이슬람 혐오’ 감정을 부추기고자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프랑스만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은 아니다. 터키, 영국, 스페인, 덴마크, 미국…. 현재 유럽을 비롯한 모든 국가는 일상에서 테러의 위협을 겪고 있다.”

―파리 테러 이후 각국에서 이슬람에 대한 증오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급기야 미국에서는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무슬림 입국 금지’ 발언까지 했는데….

“이슬람 혐오와 테러리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IS는 서구권 국가를 공격하면서 해당 국가에 사는 무슬림 인구에 대한 혐오 감정을 유발해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로 넘어가도록 하는 전술을 쓰고 있다. 이 함정에 빠지는 트럼프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테러와 맞서 싸운다면서 테러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무슬림과 IS가 행하는 테러 행위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 ‘11·13 파리 테러’에서 사람들은 인종과 신앙을 불문하고 공격받았다.”

―지난해 말 프랑스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이 1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다. 유럽 곳곳에서 반(反)이민, 반EU를 내건 정당이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높은 실업률이 첫 번째 이유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일부 국민에게는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위기와 실업 공포에 대한 표적이 필요하다. 좋은 뉴스는 자국(自國) 정권의 치적으로 포장하고, 문제점은 EU 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EU는 세계 인구의 6%,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2%를 차지하지만 복지에는 세계의 50% 정도를 지출한다. 이 때문에 EU 밖의 국민은 유럽 모델이 굉장히 성공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여 가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내부의 유럽인들은 EU의 경쟁력 상실에 실망하고 있다.”

―테러와 난민 위기에 맞서기 위해 유럽 각국에서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통제를 강화한다. 유럽 내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조약이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한가.

“지금 상황은 서유럽과 구공산권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의 분열이다. 서유럽은 이주민을 받아들인 경험이 많지만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은 이런 경험이 전혀 없어 난민 수용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도 매우 크다. 해당 국가에 무슬림 인구가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세계는 새해부터 테러와 분쟁, 실업과 난민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유럽에서는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등으로 EU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국제정치학자로서 유럽연합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보니파스 소장은 “지난 2년간 ‘유로화의 죽음’이 거론됐지만 유로화는 결국 살아남았다”며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상호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럽연합은 결코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지 않으며, 위기를 겪을수록 더욱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고 희망을 피력했다.

※ 파스칼 보니파스는

○ 1956년 프랑스 파리 출생

○ 1985년 파리 정치대(시앙스포) 국제정치학 박사

○ 1991년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창설

○ 1999∼2003년 프랑스 국제협력최고자문위원회 위원

○ 2001∼2005년 유엔 군축자문위원회 위원

○ 2013년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 기사장과 레종 도뇌르 기사장

○ 현재 파리 8대학 유럽학 연구소 교수

○ ‘전략연감’과 계간 ‘국제전략학술지’ 발행인 겸 편집주간

○ 주요 저서: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핵의 세계’ ‘4차 세계대전이라고?’ 등 50여 권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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