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기 경제부 기자
당시 바나나가 비쌌던 이유는 수입량이 극히 적어서다. 1980년대 바나나는 수출한 만큼만 수입하는 ‘구상무역’ 형태로 수입됐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TV를 수출하면 그 액수만큼만 바나나를 들여오는 식이다. 무역 규모가 작다 보니 들여오는 바나나도 적었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상공부에 따르면 1988년 우리나라의 수출입을 합친 무역고(高)는 1125억 달러로 1987년(883억 달러)보다 27.4% 증가했다.” 한국이 사상 최초로 무역 규모 1000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소식은 1989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렸다. 무역 규모를 키우는 것은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있던 대한민국의 지상과제였다.
문제는 정부가 아직도 ‘무역 0달러’의 신화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세계 경기침체와 저유가로 수출과 수입이 모두 줄면서 무역 1조 달러 기록이 깨지자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올해엔 꼭 1조 달러를 회복하겠다며 수출을 늘릴 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무역 규모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일까.
아이폰 뒷면을 보면 ‘디자인드 바이 애플 인 캘리포니아, 어셈블드 인 차이나(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 Assembled in China)’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미국 애플 본사에서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조립했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만든 완성품을 세계 각지에 팔아도 미국 국경을 나간 적이 없으니 통관을 기준으로 하는 수출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폰 한 대를 팔 때마다 생기는 부가가치의 대부분은 애플 본사와 미국이 가져간다.
이 같은 글로벌 가치사슬 체계에서는 얼마나 많이 수출했느냐보다 무역을 통해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했느냐가 중요하다. 최근 한국의 가입이 논의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아시아를 가치사슬로 단단하게 묶는 경제협정이다. 최낙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출 총액에 집착하지 말고 수출을 통해 일자리와 부가가치를 얼마나 만들어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제는 낡은 신화를 버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