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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경매 시스템, 시장 신뢰 흔들

입력 | 2016-01-11 03:00:00

이우환 작품 ‘위조 감정서’ 내용 가리고 직인 빠졌는데도 못 알아채
관계자들 “간단한 진위 확인도 소홀”




“이우환 화백(80)의 작품과 첨부 감정서 진위를 가능한 한 모두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방법을 논의 중이다.”

가짜 감정서가 붙은 그림이 이 화백 작품으로 등록돼 지난해 12월 K옥션 경매에서 4억9000만 원에 낙찰됐다는 동아일보 기사(8일자 A18면 )를 읽은 한 화랑협회 관계자의 말이다.

○ 급성장 경매시장 신뢰도 곤두박질

K옥션은 8일 “감정서는 위조됐지만 작품이 가짜라고 단정할 수 없다. 우리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매에 그림을 내놓은 원소유주 정모 씨(31)를 소환 조사한 경찰은 “감정서가 있어 위작으로 의심하지 않았다는 경매사 주장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압수된 위조 감정서는 작품 사진으로 문서의 요지 내용을 덮어 가린 데다 화랑협회 한글 직인도 누락돼 얼핏 봐도 어색하기 때문이다(그래픽 참조). 하단 발행일자 표기 부분에는 오려낸 숫자를 삐뚤빼뚤 짜깁기해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감정서 발행처에 간단한 진위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경매 시스템의 신뢰도 부족을 지적한다. 특히 최근 2년 새 4배 가까이 성장한 인터넷 옥션 시장을 이용한 소액 구매자들은 불안감과 배신감을 누르기 어렵다. 이들이 그림을 구매하며 믿고 기댄 건 오직 ‘국내 2위 대형 경매사인 K옥션’의 명망뿐이다. K옥션은 국내 최대 사설화랑 중 하나인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의 주도로 2005년 설립됐다. 지난해 금융감독원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박 회장의 장남 도현순 K옥션 전무, 남편 도진규 전 한국산업증권 부사장 등 친인척이 57.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이번엔 메이저 경매에서 유명 작가의 작품이 큰 금액에 거래됐기 때문에 많은 이목을 끌어 감정서 위조 사실이 밝혀진 것”이라며 “개인 간 비공개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가짜 감정서가 돌아다닐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 해묵은 위작 논란 마침표 찍을까

경찰로부터 문제의 그림 ‘점으로부터 No. 780217’ 분석을 의뢰받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안료 재질 확인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이 화백 그림은 안료에 석채를 섞어 변색이 적은 게 특징인데 경매에 나온 그림은 탈색되다시피 변질된 상태였다”는 것이 감정 전문가들의 견해다.

달아오른 단색화 붐을 타고 승승장구하던 미술경매 시장 관계자들은 “속히 경찰 수사 결과가 나와 불안 요인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이 화백을 흉내 낸 위작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박영진 대장은 “감정 전문가의 객관적 판단과 위조 용의자 조사 결과를 충분히 확보한 뒤 결론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해묵은 위작 논란이 뚜렷한 해결 없이 반복되는 건 객관적 진위 판단을 위한 기초 자료가 질적 양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크리스티, 소더비 등 해외 대형 경매사는 자체 감정 시스템 외에 유명 작가별 전문 재단이 발행해 정기적으로 개정하는 ‘전작(全作) 도록’을 데이터베이스로 활용한다. 전작 도록은 한 작가가 어떤 그림을 언제 완성해 누가 어떻게 보관해 왔는지 검증된 기록을 집대성한 자료다. 반면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등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전작 도록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이제 겨우 발간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립 미술관 관계자는 “이 화백이 위작 논란이 일었던 2013년 자신의 작품 감정 권한을 박명자 회장과 신옥진 부산공간화랑 대표에게만 제한한 것도 감정서 위조를 부추긴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고 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