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 전설 백성희씨 ‘하늘나라 무대’로
8일 별세한 백성희 씨의 최근 모습(맨위 사진). 1954년 유엔군 위문 공연을 위해 방한한 메릴린 먼로와 팔짱을 끼고 있다. 당시 백 씨는 배우 최은희 씨와 함께 대구 동촌비행장으로 먼로를 마중 나갔다. 백성희·국립극단 제공
배우 박정자 씨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박 씨와 손숙 씨는 최근 해외여행을 나갔다가 8일 밤 원로배우 백성희 씨의 별세 소식을 듣자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해 10일 서울아산병원의 빈소를 찾았다.
손 씨도 “불과 얼마 전 요양병원에 계신 선생님을 뵈러 갔을 때만 해도 뽀얗게 분을 칠하고 립스틱을 바른 얼굴로 맞아 줬다”며 “여배우로서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기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10일에는 배우 이순재 남일우 이대로 변희봉 윤석화 송승환 씨와 극작가 배삼식 씨 등이 조문했고, 박정자 손숙 윤석화 씨는 상주 역할을 자처하며 조문객을 맞았다. 전날에는 연출가 손진책 김광보 씨 등이 조문했다.
1925년 서울에서 10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고인은 동덕여고 2학년 때 가극단을 함께 운영하던 ‘빅터 무용연구소’에 연구생으로 몰래 들어가 연기를 배웠다. 1943년 현대극장 ‘봉선화’(함세덕 작·연출)에서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뒤 1950년 국립극단에 창립 단원으로 들어가 2010년까지 60년간 단원으로 활동했다. 국립극단에서만 400여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1994년 자서전에서 “요조숙녀, 요부, 인민군 장교,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무녀까지 안 해 본 인물이 없다”고 했다. 나이를 모르는 배우로도 유명했다. 1982년 50대 중반에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17세 공주 역을 맡기도 했다.
1972년부터 3년간 여성 최초로 국립극단장을 지냈고 80대 후반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2011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개관작 ‘3월의 눈’에서 고 장민호와 함께 남녀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원한 현역’이란 별명을 얻었다. 2013년 10월 명동예술극장에서 마리아 역으로 출연한 ‘바냐 아저씨’가 유작이 됐다. 고인의 연기 지론은 “배역은 곧 배우의 인격,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부터 돼라”는 것이었다.
생전에 그는 이렇게 자주 후배들에게 얘기했다. “내가 연극인지, 연극이 나인지 모르겠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불태우고 싶을 뿐이다.” 또 그렇게 살다가 갔다.
유족은 나결웅·나미자 씨 등 1남 1녀. 발인은 12일 오전 8시 반. 영결식은 12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이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노제가 이어진다. 02-3010-2000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