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한반도 닭의 역사는 길다. 김알지, 김수로왕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신라와 경주를 계림(鷄林)으로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양계장이 있었다. 우리는 닭을 오래전부터 가까이했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도구로 금육의 대상이다. 돼지는 하는 일 없이 곡물을 먹는다. 만만한 게 닭이다. 산과 들에서 벌레와 잡초 씨앗을 먹는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궁중과 민간 모두 만만하게 닭을 대했다.
조선시대 ‘태종의 닭고기’는 가슴 아프게 한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비롯하여 충녕대군(세종대왕) 등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다. 막내 성녕대군은 열네 살에 죽었다. 귀한 늦둥이였다. 태종 18년(1418년) 5월 9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태종이 먼저 이야기한다. “성녕이 평소 쇠고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소를 가볍게 도축할 수는 없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종묘 제사 때 도축하면 그때 사용하겠다. 제사에 닭을 사용하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가?” 신하들이 대답한다. “제사 음식으로 닭을 쓰는 것은 오래전부터 예법에 있었습니다.” 태종이 말한다. “성녕이 닭고기 또한 좋아했다. 닷새에 한 마리씩 닭을 상에 올리라.”
중종 20년(1525년) 10월, 궁중에서 ‘독극물로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자궁에게 말린 고기(脯肉·포육)와 닭고기를 올렸다. 신하들이 이 음식을 하사받아 먹었다가 몇 명이 배탈이 나고 드러누웠다. 세자를 겨냥한 독극물 투입 가능성도 있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동안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닭고기를 지네가 씹어놓으면 독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지네를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했더니 전부 닭고기를 토하고서 소생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이 사건은 닭 때문인지, 말린 고기 때문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말린 고기에 ‘생산자 표시’를 해서 조심하자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닭고기’는 ‘닭과 기장밥’ 그리고 우정에 대한 것이다. 중국 후한 때 범식과 장소는 태학에서 같이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범식은 장소와 헤어지면서 “2년 뒤 9월 15일 그대 집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한다. 마침내 그날, 장소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었다. 장소의 부모는 “범식의 고향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어찌 그가 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장소는 “범식은 신의가 있는 선비이니,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식이 도착하였다. 닭(鷄)과 기장(黍)밥에 얽힌 약속(約), 즉 계서약(鷄黍約)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닭과 기장밥’의 우정을 부러워했다. 친구가 찾아오면 ‘계서’를 준비한다는 표현도 흔하게 나타난다.
조선시대 가장 흔했던 닭요리는 ‘백숙(白熟)’이다. 백숙이 닭고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조미도 하지 않고 쪄낸 모든 고기 음식이 백숙이다. 오늘날의 백숙은 조선시대의 ‘연계증(軟鷄蒸)’이다. 닭고기를 부드럽게 쪄낸 것이다. 연계증은 ‘연계백숙(軟鷄白熟)’ 혹은 물로 쪘다고 수증계(水蒸鷄)라고도 했다(‘음식디미방’). 1795년 6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신날 밥상에도 연계증을 올려놓았고,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별미로 연계증이 거론된다.
재미있는 닭 음식도 있다. ‘계주(鷄酒)’는 삶은 닭 속에 술을 머금은 솜을 넣은 것이다. 여행용 닭고기다. ‘계고(鷄膏)’는 진하게 졸인 닭곰탕이다. 닭 살코기만 담은 옹기를 가마솥에 넣고 오랫동안 중탕한 것이다. 닭고기는 맛이 없어지고 진액은 식욕부진으로 해석되는 비허증(脾虛症)에 좋다고 했다(‘성호사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