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1999년 3월 북한 공작선으로 추정되는 괴선박 2척이 일본 영해를 침범해 일본 사회가 들끓고 있을 때 자위대 간부 출신인 자민당의 나카타니 겐 의원(현 방위상)은 쾌재를 불렀다.
자위대는 괴선박을 추격하면서 1954년 창설 이후 처음으로 ‘실제상황’ 발포와 폭탄 투하를 실시해 기존의 금기를 깼다. 한 해 전인 1998년 8월 일본열도 상공을 통과해 태평양까지 날아간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이은 영해 침범 충격은 안보불안 심리를 확산시켰다. 나카타니 의원의 발언은 ‘평화헌법’에 묶인 군사력 증강의 빗장을 풀 수 있는 호기(好機)를 맞았다는 일본 보수세력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北도발’ 때마다 군비 증강
북한 미사일 발사와 괴선박 영해 침범 이후 일본은 정보수집위성 발사계획을 마련했다. 미사일 파괴탄두, 미사일 추적센서, 2단계 로켓추진장치를 미국과 공동 연구하는 전역미사일방어(TMD) 계획도 확정했다. 자위대의 무기사용 권한을 확대하는 자위대법 개정안 등 미일방위협력지침 관련 3개 법안도 의회를 통과했다.
일본은 외부 위협을 활용해 국가 목표를 달성한 사례가 적지 않다. 메이지 유신이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맥아더 개혁’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잇따라 터진 북한의 도발은 전후(戰後)의 유산인 비무장화의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을 도운 핵심 변수였다. 2006, 2009, 2013년 북한의 세 차례 핵실험도 방위력 증강의 계기로 톡톡히 활용했다. 일본은 북한이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쏘면 자체 요격할 역량도 갖췄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과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해치는 안보상의 중대 위협”이라고 규탄한 뒤 독자적 대북 제재조치를 지시했다. 5월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를 중요 의제로 상정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대북 규탄과 제재에 이어 일본이 ‘북한 위협’을 내세워 추가 군비 강화에 나서는 것은 시간문제다. 외무성보다 방위성의 움직임을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는 작년 9월 집단 자위권 행사를 뼈대로 하는 안보법안을 강행 통과시킨 뒤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던 아베 신조 총리에게 정치적으로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만만치 않은 흐름을 형성했던 안보법 폐지 주장은 북핵 실험 후 영향력이 격감했다. 당초 자민당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경제 이슈로 승부한다는 방침이었지만 지금은 안보 이슈를 전면에 부각하는 것이 선거에 더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민족’ 운운할 자격 있나
아베 총리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구출 운동에 나서면서 정치인으로 급성장했다. 4차 북핵 충격은 참의원 선거 승리와 권력기반 강화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김정일-김정은 부자(父子)가 아베의 핵심 선거 운동원이자 일본에 군사대국화의 멍석을 깔아준 일등공신”이라는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농담도 나온다.
나는 돌발변수가 없는 한 일본의 방위력 증강 그 자체는 한국에 당분간 큰 위협이 된다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같은 피를 나눈 동포들이 사는 북한을 통치하면서 생지옥을 만든 독재자들이 과거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의 군사대국화 빌미를 제공한 현실은 기가 막힌다. 걸핏하면 민족을 내세운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이 국수주의자들을 포함한 일본 보수세력의 재무장 숙원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도우미’로 전락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反)민족적 행위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