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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흙수저도 쉽게 금수저 될 수 있다… 게임 속에서”

입력 | 2016-01-16 03:00:00

스마트폰 사회풍자형 게임에 열광하는 청년들




‘만수르 게임’을 만든 블리엔 정진규 대표(위 사진)가 후속 작 ‘만수르게임2 금수저’를 소개하고 있다. 만수르 게임은 거지인 주인공이 중동 왕족 만수르와 같은 부자가 되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내용이다. 블리엔 제공

‘나는 거지다. 휴지통과 깡통만이 나의 벗이다.’

모바일게임 ‘만수르 게임’을 실행하면 게임 주인공이 거지 캐릭터로 시작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1초마다 5000원씩 자동으로 ‘사이버머니’가 늘어났다. 게임 화면에 보이는 ‘수익률 5000’이 의미하는 바가 이를 뜻한다는 사실을 잠시 뒤 눈치챘다.

하늘에서 돈주머니가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스크린의 돈주머니를 터치하면 6000원, 1만 원 등이 표시됐다. 사이버머니는 자동 증가분에 더해 그만큼 추가로 쌓였다.

게임을 시작한 지 1분 30초 정도 지났을까. 내가 보유한 사이버머니는 50만 원을 넘어섰다. 화면에 보이는 ‘업종 변경’을 터치했다. 업종 변경을 위해서는 50만 원이 필요했다.

수익률은 5000에서 6000으로 올랐다. 초당 벌어들이는 돈이 5000원에서 6000원으로 올랐다. 동시에 스크린에서 구걸하던 거지는 ‘거리의 악사’로 변신했다. 돈을 벌어서 업종 변경을 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인 셈이다.

화면에 보이는 ‘매출 증가’를 터치해 봤다. 10만 원이 차감됨과 동시에 수익률은 6000에서 7800으로 올랐다. 이따금 돈주머니와 함께 복권도 떨어졌다. 긁으니 1만 원 당첨. 때로는 ‘꽝’도 나왔다. 다음 업종 변경을 위해서는 150만 원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 거리의 악사 말고 또 어떤 직업으로 변신할지 기대하게 됐다.

거지로 시작해 아랍에미리트(UAE) 국제석유투자회사 사장이자 왕족인 거부(巨富) 셰이크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하얀 같은 부자가 된다는 ‘만수르 게임’부터 광부인 아버지가 힘겹게 돈을 모아 갓난아이를 건장한 성인으로 키운다는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까지. 돈과 성공만을 좇는 사회 분위기와 일자리, 육아 등의 사회 문제를 희화화한 ‘사회 풍자형’ 모바일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조덕제 파이어스타 대표가 자신이 만든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 모바일 게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무경 기자 fighter@donga.com

사회 단면 엿보는 ‘현실풍자’ 게임들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는 갓난아이를 키우는 육아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유저는 광부가 된다. 광산 노동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올수록 아이의 키, 몸무게, 지능지수(IQ), 근육량 등을 키워 줄 수 있다. 키, 몸무게에 각각 15만 원을 투자하면 0.01cm, 0.01kg 증가하는 식이다. 갓난아이를 키워 결혼자금까지 지원하면 엔딩을 볼 수 있다.

플레이 방법은 단순하다. 화면을 두드리듯 터치만 하면 된다. 다만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꾸준한 단순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광부가 한 번 땅을 파면 100원씩 돈을 벌 수 있다. 이렇게 15만 원을 벌면 아이 키 0.01cm를 키울 수 있다. 돈을 다 못 벌었는데 아이를 성장시키는 버튼을 누르면 ‘돈이 없어요, 아빠 힘내세요’라는 메시지가 뜬다. 이 게임은 앱 마켓 구글플레이에서 10만 다운로드를 기록하고 있다.

왜 이런 게임을 만들었을까.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를 만든 조덕제 파이어스타 대표는 “아내가 최근 출산을 했다. 아내가 임신한 모습을 보면서 향후 아이를 낳아 키우려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게임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가 어렵다는 데 공감하는 유저들이 많이 다운로드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 꿈은 정규직’은 백수에서 사장이 되는 것이 목표인 게임이다. 인턴 취업부터 쉽지가 않다. 게임 플레이 10초 만에 ‘권고사직’을 당한다. 왜? 서류에 ‘0’을 하나 더 썼다는 게 이유다. 이 밖에 갖가지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하면서 계속 재취업한다. 사장 자리까지 가는 것이 이 게임의 목표. 이 게임 앱은 2015년 3월 출시된 이래 국내에서만 150만 다운로드를 넘어섰다.

‘내 꿈은 멘탈갑’은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취업준비생, 직장인, 중년, 노인 등 다양한 연령층에서 겪을 수 있는 잔소리를 귀로 막는 게임이다. 예컨대 중고등학생을 선택하면 좌우에서 “노오력이 부족해!” 같은 잔소리 문구가 귀를 향해 들어온다. 이용자는 화면 터치를 통해 왼쪽, 오른쪽 귀를 닫을 수 있다. 잔소리 문구 대신 돈이 들어오면 귀를 열어 받으며 임무를 완료한다. 지난해 12월 출시된 이 게임은 1만 건 다운로드됐다.

‘거지 키우기’는 구걸로 돈을 벌어 부동산, 기업, 심지어 도시까지 구입하는 게임. 흥미로운 점은 돈을 모아 ‘알바 고용’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패셔니스타부터 화가, 로커(가수), 피아니스트, 축구 선수, 과학자, 의사, 판사까지 섭외해 함께 구걸로 돈을 모을 수 있다. 2015년 7월 출시 이래 300만 다운로드를 넘어섰다.

거지 키우기 제작사 마나바바의 이동수 이사는 “유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게임을 고민하다 보니 거지라는 소재를 발견하게 됐다”며 “게임이 폭력성이 없고 조작이 간편하며 무료여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만수르 게임은 2014년 11월 출시된 이래 구글플레이에서 90만 번 다운로드됐다. 후속작인 ‘만수르 게임2 금수저’는 2015년 12월 출시돼 16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만수르 게임이 거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만수르 게임2 금수저’는 청년백수를 주인공으로 다뤘다.

만수르 게임을 만든 정진규 블리엔 대표는 “한국은 누구나 알 듯 불경기다. 사람들에게는 ‘돈 버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와 게임 스토리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젊은층 공감으로 인기몰이… 비뚤어진 현실 반영 우려도

현실풍자 게임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현실풍자 게임은 맹목적으로 ‘부(富)’를 좇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저성장 시대에 고용 창출이 이루어지지 않아 청년실업자가 양산되고 있는 현실, 맞벌이 가정에서 생기는 육아의 어려움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풍자 게임은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을 담고 있다. 가상현실이지만 더욱 현실적이기에 사람들은 현실풍자 게임에 더 몰입하게 된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실세계에서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재력, 학벌 좋은 부모 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경쟁자들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며 “이 같은 현실을 게임에서 공감하며 씁쓸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창호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이 같은 게임을 즐겨 하는 이유는 청년들이 이른바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며 “게임을 통해서라도 갑의 지위를 가져 볼 수 있어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좋지 않은 면은 없을까. 현실을 과장해 해학적으로 풀다 보니 일부 인상을 찌푸릴 만한 설정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만수르 게임에서는 자해공갈을 해서 돈을 버는 장면이 나온다. 캐릭터가 자동차에 치여 부상을 입는 상황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까지 자해공갈 장면은 반복해서 노출된다.

내 꿈은 정규직에서는 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인턴사원 취업조차 대여섯 차례나 낙방한다. 일을 하려고만 하면 권고사직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회를 배경으로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크게 왜곡돼 있다. 이 같은 게임 설정들은 나이 어린 이용자들에게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회상을 가르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본의 게임 콘텐츠를 보면 스토킹을 콘셉트로 ‘미행’이라는 게임이 인기를 끌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한국에서 나온 현실풍자 게임들은 일본 게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하지만 자해공갈 같은 자극적인 요소들이 적용된다면 일본 게임의 자극성을 향해 가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한국의 앱 마켓에서도 여성을 몰래 미행하거나 투명인간이 돼 목욕탕에 들어가는 등 사회통념에서 벗어나는 게임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스트레스 한국’서 벗어날 안식처라는 해석도

현실풍자 게임을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게임 특성상 그래픽이 조잡하고 단순해 장기간 플레이할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이 높지 않다. 오히려 팍팍한 한국 현실에 대해서 한번쯤 더 고민해 보게 된다. 또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학적으로 잊을 수 있는 일종의 안식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김지현 서울사이버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실풍자 게임이 인기지만 6개월을 집중할 만큼 중독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빠져들 정도로 재미를 느낄 거리가 많지 않다. 이런 부류의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현실풍자 게임의 흥행은 게임산업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게임산업의 대형화에 따라 군소 게임 개발사가 창업해 성공할 가능성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현실풍자 게임은 제작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1인 창작자나 10명 안팎의 게임 개발사에서 쉽고 빠르게 개발할 수 있다. 실제 언급한 풍자게임 회사들은 임직원이 1명에서 많아야 7명이었다. 현실풍자 게임처럼 새로운 장르의 게임이 성공하면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 청년실업 문제를 일부 해소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내 꿈은 정규직을 제작한 이진포 퀵터틀 대표는 세 차례나 전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받은 실업자였다. 게임이 성공하자 성공한 창업자이자 두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중소기업 대표가 됐다. 이 게임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등 8개국 언어로 번역돼 50만 명의 해외 유저들이 즐기고 있기도 하다.

정 대표는 “(현실풍자 게임은 대체로) 화면을 두드리며 돈을 버는 일종의 ‘막노동 게임’이다. 게임업계에서는 새로운 장르다. 작은 게임 개발사는 대형 게임회사에 비해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작은 게임회사가 성공하면 일자리 창출 등 산업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신무경 기자 fight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