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기자가 만난 사람]연세대 설립 언더우드家 4대 피터 언더우드
《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한국이 좋아서 4대째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미국인 가문도 있다. 언더우드가(家)다. 18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 새문안교회,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 등을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의 4대손인 피터 언더우드(한국명 원한석·61) ㈜IRC 시니어 파트너는 선조들처럼 “한국이 좋아서” 호주 출신 아내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한국에 뿌리를 둔 서양인”, “‘불편한 간격’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2012년 내놓은 책 ‘퍼스트 무버’에서 “한국이 격변하는 시대에 ‘뒤따르는 자(팔로어)’가 아닌 ‘선도하는 자(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과거의 성공 공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았다. 그간 한국은 더 나아졌을까. 최근 서울 용산구 IRC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피더 언더우드 ㈜IRC 시니어파트너는 삼겹살에 폭탄주도 즐기는 영락없는 한국 아저씨다. 딸과 조카를 얘기 할 때 ‘우리 딸’ ‘우리 조카’라고 말한다.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내가 아는 게 없어서”라고 망설였고, 사진을 찍자고 하니 “인물이 별로라서”라며 한국인 특유의 겸양의 화법을 보였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살기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죠. 통계로 봐도 이민 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젊은이들이 내 꿈을 향해 갈 수 없으니 ‘헬조선’이란 말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 꿈이 있는 학생이 정말 드물어요. 내 꿈이 있는 것도, 내 꿈을 좇아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시킨 일이나 사회가 기대하는 걸 해요. 그러니 만족도, 행복도 느끼지 못해요.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내 꿈을 한국에서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 달라질 겁니다.”
“정답만 찾는 교육은 창의성 못길러”
―젊은이들이 꿈을 좇게 만들려면 어떤 개혁이 필요한가요.
“개혁, 혁신 같은 것들을 자꾸 정부나 대통령에게 요구하는데, 변화를 만들려면 모두의 마인드를 바꿔야 해요. 대통령이 새해에 몇 가지 골라 개혁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오늘 내가 바꾸면 변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변화의 권한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가장 큰 책임은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학교 가고 대기업에 취업하라고 얘기해요. 모두 똑같은 생각뿐이고, 똑같은 방향만 봐요. 같은 길로 안 가면 내 이웃이, 내 동료가 나를 저평가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행복한 생활과 시간보다 남들이 날 어떻게 보느냐에 더 신경 쓰는 거죠. 그러니까 한국인의 행복감도 낮아요.”
―책에선 노벨상이 나올 수 없는 문화라고 지적했는데요.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정부는 모두가 공평하고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만 하면 돼요. 한국에는 아직도 ‘담당 문화’가 있어요. 문제가 발생하면 ‘어디에 아는 사람이 없느냐’, ‘누구한테 전화해야 되느냐’며 담당자부터 찾아요. 이래선 공정거래가 될 수 없어요. 법은 잘 돼 있는데 법을 잘 지키지 않고 남에 대한 신뢰도 낮습니다. 정부가 창업 회사에 지원금을 주는 것도 반대입니다. 자금을 받는 기술만 발전해요. 외환위기 때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한 섬유회사 사장의 말이 기억나요. 경쟁사는 부도가 났지만 정부가 은행 대출 상환 기간을 늘려 주고 이자도 깎아 줘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장은 ‘잘되는 회사를 지원하지 않고 경쟁력이 없고 경영을 못하는 회사를 지원하는 게 공정한 것이냐’고 묻더군요. 공평하고 공정한 거래 문화가 있으면 정부가 지원금을 주지 않아도 창조경제는 자동으로 될 겁니다.”
그는 시장주의자다. 중소기업을 인위적으로 육성하는 것을 반대하듯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재벌도, 중소기업도 공평한 규칙으로 경쟁하고 승복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신적인 퍼스트 무버 기업이 한국에 많지 않다는 걱정도 많습니다.
“실행 할때만큼 생각도 빨라져야”
―세계 1등인 조선업이 생소한 해양 플랜트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있는데요. 퍼스트 무버의 리스크 아닌가요.
“퍼스트 무버여서 문제라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위기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게 근본 문제입니다. 그냥 눈 감고 뛴 겁니다. 퍼스트 무버는 리액션이 빨라야 해요. 우리는 결정된 일을 실행하는 데 빨라요. 총을 쏠 때 ‘ready(준비), aim(조준), fire(사격)’의 순으로 하는데, 한국은 ‘fire, aim, ready’로 일을 해요. 하지만 결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이젠 생각도 빨리 하고 결정도 빨리 해야 해요. 그러려면 모든 팀의 능력이 다 일정하게 뛰어나야 합니다.”
―정치는 어떤가요.
“가장 심한 파벌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정치권입니다. 나라를 위해, 지역구를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아요. 애국심이 많이 빠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그 노조위원장(조계사에 은신한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의 커리어가 먼저인 것 같아요. 모두가 좋은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 언론을 통해 인정받고 힘 있는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해요. 이런 게 권위주의입니다. 국민이 제대로 평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정치 얘긴 하지 말자”고 손사래를 쳤다. 정치의 문제는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미 공화당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선 “막말하고 재미있게 말하긴 해서 인기가 있는 건데, 그건 엔터테인먼트로 끝나야 한다. 지도자의 덕목은 아니다”라며 걱정했다.
―책에서 ‘북한은 한국의 7대 재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당시 북한의 경제 규모가 재벌 매출액과 비교하면 7번째쯤 된다고 해서 그렇게 말했어요. 통일은 빠를수록 좋죠. 하지만 통일이 돼 모든 북한 사람이 남으로 온다면 통제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전에 ‘당신이 관리하는 땅을 5년만 지키면 당신 것이 된다’는 메시지를 북한 주민에게 미리 보낼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그들도 ‘아, 통일이 정말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거고, 통일이 되고 난 뒤에도 북의 땅을 지키고 있을 것 아닌가요.”
“언더우드家 한국 떠날 일 없어”
―언더우드 가문의 마지막 후손 아닌가요.
“마지막이라고 말하진 마세요. 2005년 형(원한광 전 한미교육위원단 단장)이 한국을 떠날 때도 ‘언더우드 가문이 한국을 떠난다’는 잘못된 보도가 있었어요. 5세, 6세도 저처럼 한국에 올지 모릅니다. 언더우드가는 해외에 있더라도 매일 한국 신문 보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딸도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고 있는데 한국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죠. 언더우드가가 한국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은퇴 후 호주 사람인 아내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긴 하지만…. 결혼한 이상 혼자 결정할 순 없어요.”
컨설턴트답게 달변인 그는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나 정치인을 꼽아 달라고 했더니 한참을 망설였다. 그는 “부모님밖에 안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장단점이 있으니 한 명을 꼽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말했다.
―언더우드 가문만의 교육법이 있나요.
“성인이 돼 처음으로 아버지와 진솔한 대화를 했다는 연세대의 한 학생 얘길 듣고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런 좋은 교육 기회를 놓칠 수 있어요. 전 아버지(고 원일한 연세대 재단이사)와 대화와 토론, 여행을 많이 하며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라’고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동기를 함부로 예단하지 말라’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이를 너무 의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모든 권한과 책임이 나한테 있고, 나부터 직접 실행하라는 겁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첫 번째 꿈을 키우고 좇아가라! 남의 꿈이 아닌 자기 꿈. 두 번째로 호기심을 많이 가져라!”
그는 2시간의 인터뷰가 끝난 뒤에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다른 나라는 다 잘하고 우리만 못 한다는 얘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발전해야 하니까 고쳐 가야죠. 오해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피터 언더우드는▼
1955년 5월 5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석 달 후 한국에 왔다. 서울 신촌에서 친구들과 개구리를 잡고 언 논에서 썰매를 지치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샌프란시스코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살고 있다. 현재는 외국 기업 대상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력서엔 ‘영어는 원어민, 한국어는 능통’이라고 적혀 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