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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송평인]김형욱이 만든 철학자 신영복

입력 | 2016-01-19 03:00:00


신영복의 첫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왔을 때 무기수가 감옥에서 그런 맑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소주 ‘처음처럼’이 나왔을 때는 정겨운 글씨체가 신영복의 것이라는 데 대해 다시 놀랐다. 그의 ‘강의’나 ‘담론’을 읽으면서는 동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신선한 해석에 거듭 놀랐다.

▷신영복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만든 철학자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의 활동으로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됐다.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가혹했을 것이다. 신영복이 실제보다 더 깊이 연루된 것처럼 기소됐을 수 있다. 무려 20년이나 가두는 바람에 그는 철학자가 됐다. 한학자 이구영과 감옥에서 한 방을 쓰면서 한학을, 감옥으로 교육 나온 서예가 조병호에게 글씨를 배웠고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신영복은 한홍구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주범 김질락이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친노 정치인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의 ‘상부선’이었다. 통혁당 사건은 함께 연루된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가 실체를 증언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의 많은 사상범이 민주화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신영복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았다.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이 부풀려졌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혁명을 꿈꾸었던 사실 자체를 구질구질하게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는 볼셰비키에 적대적인 누군가가 “인간적으로는 볼셰비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영복이 싫어서 소주 ‘처음처럼’은 마시지도 않는다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대체로 신영복의 정신세계는 이념을 뛰어넘어 사랑받았다. 세상을 바꾸는 데 냉철한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따뜻한 가슴보다는 실천하는 발이 중요하다는 식의 잠언(箴言)은 현대인에게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는 저세상으로 떠날 때까지 그가 원한 세상을 정치경제학의 용어로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을 묻는 것이 환상을 깨는 것처럼 느껴져 아무도 묻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