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의 최후
독립운동가 김상옥.
소한 대한 다 지나면 얼어 죽을 자식 없다는 엄동에 갑자기 봄이 온 듯한 날씨였다. 한데 길은 유리장판을 깐 듯 미끄러웠다. 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강풍이 몰아쳐, 꼭두새벽부터 시작된 비가 내리는 족족 얼어붙었다. 대한에 비가 온 것은 기상관측 이래 처음이라고 경성측후소는 밝혔다. ‘대한(大寒)에 대우(大雨).’ 당시 신문 기사 제목처럼 부슬비 자욱한 서울 효제동 주민들에게 잊지 못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월 22일 월요일 아침 7시 반. 해 뜨기 15분 전이었다. 정적을 깨는 굉음이 모두를 구들장의 온기로부터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3시간 동안 서울을 발칵 뒤집어놓는 대활극이 시작됐다.
그런데 김상옥은 그가 나고 자란 효제동 마을로 갔다. 후암동에서 동포의 밀고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찾아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경찰이 은신처에 들이닥치자 그는 마주친 경찰 간부를 저격하고 바로 집을 뛰쳐나갔다. 다닥다닥 붙은 작고 낮은 집들을 옮겨다니며, 1000명 가까운 경찰이 삼중사중 둘러싼 가운데 총격전이 이어졌다. 맨발로 담을 넘어 들어간 어느 집에서는 문전박대를 받고, 그 와중에 서로 언성을 높이느라 포위망이 좁아졌다.
서양 활극처럼 그는 차가운 벽을 뚫거나 넘어뜨리고 미끄러운 지붕을 타고 넘어 집집으로 이동하며 쌍권총을 발사했다. 강인하면서도 날렵해 ‘제비’라 불렸던 그는 지붕 위를 날듯 달리고 쏘았다. 여러 발 총탄을 맞고서도 그는 2시간이 넘도록 영화보다 더 극적인 활극을 이어갔다. 막바지에 몰린 그는 이웃에 청했다. “이불 좀 주시오. 그것을 쓰고 탄환을 좀 피하여 몇 명 더 쏘고 죽을 터이니.” 그러나 거절당했다.
초가집 흙담 넘어가듯 쉽게 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그의 여생은 평범했을지 모른다. 가난한 집안의 소년가장으로 어머니와 동생들 건사하느라 학교 갈 나이에 공작 직공 일을 시작했고, 철공소까지 운영하기에 이른 청년 실업가였다. 학업의 미련 때문에 17세에 입학한 곳이 지금의 효제초등학교 전신인 관립 어의동보통학교였다. 결국 한두 해 만에 중퇴했지만 YMCA에서 영어를 배우며 생업에 전념했다. 민족 해방을 위해 암살 파괴 폭파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전략을 수용하기 전까지는.
서울로 김상옥을 들여보낸 사람들은 먼 중국 땅에 있었다. 김상옥에게 지령을 내린 사람은 의열단의 책임자 김원봉이었고, 상하이에서 김상옥에게 권총 한 자루를 건네준 사람은 신익희였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