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기자들은 GOK를 ‘지옥회의’로 잘못 알아들었다. ‘아, 앞으로 쟁점 법안과 선거구 획정 협상이 지옥회의 하듯 힘들 거란 의미구나!’ 정 의장의 ‘지옥회의 전망’은 속보로 전해졌다. 일부 방송사는 친절하게 정 의장의 발언에 ‘지옥회의’라는 자막까지 달아 내보냈다. 정 의장이 실제 ‘지옥회의’라고 말했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그로부터 20일이 지났건만 쟁점이랄 것도 없는 쟁점 법안 몇 개만 여야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이러니 염라대왕이 한국 사람들 때문에 몸져누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100세까지 온갖 핑계를 대며 저승사자에게 “못 간다고 전해라”고 하더니, 이를 괘씸히 여겨 ‘지옥 불가마’에 보내면 “시원하다”며 계란까지 까먹는단다. 참다못한 염라대왕이 지옥을 개조하려 했지만 이번엔 한국 출신 국회의원들이 법안 통과를 막아 지옥 활성화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풍자 본능’이 어디서 왔는지는 GOK다.
공무원연금 개혁이든, 노동시장 구조 개혁이든 제대로 된 ‘개혁 조치’가 나온 게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회 운영이 과반수 찬성에서 사실상 합의제로 바뀌어서다. 여러 이해집단의 ‘깨알 같은 이해’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항상 ‘죽도 밥도 아닌’ 기묘한 개혁안이 나오는 이유다.
여야 협상을 ‘지옥회의’로 만든 주범인 국회선진화법의 폐해를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은 정 의장이다. 2012년 4월 20일 국회의장 직무대행이던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선진화법이 통과되면) 국정 운영에 대혼란이 온다”고 경고했다. 기자회견 직전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직접 전화를 걸었다. “황우여 원내대표를 불러 선진화법의 문제를 확인하고 처리 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됐고, 박 대통령은 자신이 통과시킨 선진화법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은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현 국회는) 선진화법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되는 그런 수준”이라고 했다. 그 폐해를 예측하지 못한 18대 국회의 수준도 19대보다 나을 게 없어 보인다.
더욱 기막힌 반전은 그 이후 일어났다. “내가 뭐라고 했느냐”며 큰소리를 쳐야 할 정 의장이 되레 선진화법 통과의 주역들인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됐다. 새누리당이 발의한 선진화법 개정안에 정 의장이 반대하면서다. 주장만 놓고 보면 정 의장이 옳다. 새누리당의 개정안은 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완화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개정되면 20대 국회는 더 난장판이 될 게 뻔하다. 여야 쟁점 법안은 죄다 ‘직권상정 고속버스’를 탈 테고, 국회 상임위원회는 있으나 마나다. “자칫 수술(선진화법 개정)에 성공하고도 환자(국회)가 죽을 수 있다”는 의사 출신 정 의장의 비유는 날카롭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