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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하이힐에서 내려와 걷는 즐거움

입력 | 2016-01-26 03:00:00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이른바 결심산업의 계절이다. 매년 반복되는 새해 목표들 덕분에 헬스장, 어학원, 다이어리, 금연초 같은 사업들이 반짝 흥하는 때다. 나 역시 매년 그런 업종에 돈을 지불해 박약한 의지를 다잡았으나, 올해는 그 대신 회사에서 주최하는 ‘100일 걷기’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했다. 100일 동안 하루에 3km씩 걷는 사내 건강 프로그램인데, 목표치를 달성하면 보상도 있다. 등록비나 수강료도 없고, 건강도 챙기고, 함께 하는 동료들의 응원까지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두말할 것 없이 참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훌륭한 새해 결심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결심을 지키는 일은 첫날부터 쉽지 않았다. 하필 시작하던 날부터 서울은 맹추위가 찾아왔다. 걷기는커녕 택시를 타도 모자랄 날씨에 나는 마을버스로 가던 지하철역까지 두 발로 걸었다. 칼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리고 옷 속으로 파고들자 이내 새해 결심을 잘못 세웠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출근길은 두 배로 길게 느껴졌고, 20분 남짓 걷고 나니 생각 없이 구두를 신은 나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3km를 채우려면 퇴근길에도 지하철 한 정거장을 걸어야 했다. 캄캄한 저녁,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기며 이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호된 첫 경험이었다.

어제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음 날부터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집을 나섰다. 여전히 춥고 지하철역은 멀게 보였지만 희한하게도 둘째 날이 되자 왠지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마음에 좀 빠르게 걸었더니 살짝 더운 숨도 나왔다. 여세를 몰아 지하철에서 한 정거장 일찍 내려 회사까지 걸었다. 분명 도심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데도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고 머리가 깨이는 듯했다. 고작 이틀 만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은 기분 때문이었을지 모르나, 며칠을 꾸준히 걸었더니 정말로 몸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밥맛이 좋아졌다. 각 재료의 다채로운 맛을 온전히 음미하며 더 즐겁게 음식을 먹게 되었다. 체력도 향상됐다. 처음에는 걷기에 버겁게 느껴지던 거리들이 나중에는 가뿐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이유를 모른 채 찌뿌듯하던 몸도 정신없이 걷고 나면 가벼워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루 목표를 다 채우고도 아무렇지 않게 더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신기한 경험들은 계속됐다.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머리가 맑아졌다. 평소에는 모닝커피를 마셔도 잠이 잘 깨지 않는 것 같았는데 아침에 30분 정도 몸을 움직인 후 회사에 도착해 찬물을 한 잔 마시고 나면 뇌에 전원이 쉽게 켜졌다. 퇴근길에 걸을 때는 하루 종일 굴리던 머릿속을 찬바람에 세척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서 정처 없이 발을 놀리고 있노라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개운해졌다.

인류가 처음으로 직립 보행을 했던 순간에 비할 바는 아니나, 최근 몇 주간 걸으며 허리를 곧추세워 두 발로 걷는 행위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몸소 체험했다. 한 발을 뻗어 땅을 짚고 다른 발을 떼어 다시 내 앞의 땅을 밟아 나가는 리드미컬한 일련의 연속 동작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호흡이 서서히 가빠지면서 심장 소리가 귓전에 울리면 살아 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걸음을 좋아하는 이와 함께 할 때면 너무 행복해서 마치 이렇게 걷기 위해 살고 있구나 싶기까지 했다.

모세혈관처럼 촘촘히 놓인 지하철과 그보다 더 섬세하게 운행되는 마을버스 노선 덕분에 좀처럼 보행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던 지난날들이었다. 매서운 날씨가 계속되지만 쨍하게 맑은 겨울 공기를 마시며 하늘 아래를 디디는 것도 이맘때만 누릴 수 있는 특혜라고 새해 결심을 다시 다잡아 본다. 당분간은 하이힐에서 내려와 낮고 편한 신발을 신을 것이다. 지면에 발바닥을 굴리는 행복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도록.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