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기호 소설가
“원래 꽃 필 땐 축의금이 많이 나가고, 눈 내리면 부의금이 많이 나가는 법이지….”
부산으로 향하는 KTX 안, 박 팀장은 건성건성 성 대리의 말에 대꾸를 해주면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천안아산역 근처를 지날 때부터 흩날리던 눈발은 오송역에 이르자 함박눈으로 변해버렸다.
“뭐, 동문회에서 몇 번 만난 적도 있다고 하더군.”
김 사장은 부산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커다란 서적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박 팀장이 다니고 있는 아동 전문 출판사로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객이었다.
“그럼 김 사장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우리 사장님이 직접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인가 봐. 7년 후배니까.”
성 대리의 말에 박 팀장은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부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비서실에서 전해준 사장의 부의금 봉투는 위아래 투명테이프로 꼼꼼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모르지, 뭐. 그래도 꽤 두툼하네.”
“저는 늘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사장들은 부의금을 얼마씩 내나. 죽은 사람보다 그게 더 오래 기억되기도 하잖아요.”
박 팀장은 그 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눈발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저기 있네요. 3호실. 김 사장이 넷째 아들인데요.”
성 대리의 말에 박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전광판을 노려보았다. 날씨 탓인지, 안경은 흐릿하고 두 눈은 시큰거렸다. 박 팀장은 재킷 단추를 단정히 채우고, 성 대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박 팀장과 성 대리는 고인의 영정 앞에 섰다. 부산의 장례식장은 서울과는 달리, 향이나 국화 대신 술을 올렸고, 부의금 함도 영정 바로 왼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박 팀장과 성 대리는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부의금 함에 사장이 전해준 봉투와 마케팅 팀에서 따로 마련한 봉투를 넣고,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그러고 다시 상주들에게 예를 갖추고 일어서다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주들이, 상주들이 모두 삼십대 초반의 앳된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십대 소년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저기, 여기가 영진사 김진수 사장님 모친 빈소가 아닌가요?”
박 팀장과 성 대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주들을 바라보면서, 그러나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가 김진수이긴 한데, 얘는 아직 고등학생인데요.”
상주 중 한 명이 십대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박 팀장과 성 대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이고, 이거 저희가 빈소를 잘못 찾아왔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박 팀장과 성 대리는 상주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곤 서둘러 빈소를 나오려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영정 앞으로 걸어갔다.
“저기, 죄송한데 저희가 낸 부의금도….”
상주 중 장남으로 보이는 남자가 부의금 함 앞으로 다가갔다. 부의금 함 뒷면은 자물쇠로 단단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거 열쇠 누가 갖고 있니?”
“매형이 갖고 있는데, 매형 지금 잠깐 집에 갔는데요.”
장남이 다른 상주와 함께 부의금 함을 거꾸로 뒤집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저금통처럼 생긴 부의금 함에선, 그러나 봉투들이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투닥투닥, 봉투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박 팀장과 성 대리도 상주들을 도와 부의금 함을 흔들어댔다. 고등학생 상주만 제자리에 선 채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윽고 사장의 부의금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봉투가 하나 더 있지요?”
장남이 벌겋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이게 전부예요.”
박 팀장은 숨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상주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서둘러 빈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봉투가 하나 더 있었잖아요? 팀장님. 왜….”
성 대리의 말에 박 팀장은 이곳저곳 장례식장 호실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부의금 함에 봉투가 너무 없더라고. 봉투가 없으니까 빠져나오지도 않고….”
“그래도 사장님 봉투는 나왔잖아요? 조금만 더 하면….”
“사장 봉투는 묵직하니까 먼저 빠져나온 거야. 우리 팀 봉투는….”
박 팀장은 그러곤 입을 닫았다. 성 대리도 그제야 무언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