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남용으로 건강위협, ‘낙태나 다름없다’ vs
가이드라인 있으면 무리 없어, ‘현실적 측면 고려해야’
2012년 8월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504개 의약품에 대한 재분류를 시행했다. 당시 가장 논란이 됐던 품목은 ‘피임약’이었다. 특히 응급피임약을 약국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려던 정책은 의료계, 약계, 종교계, 시민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의 대립을 초래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는 3년간 피임약 재분류를 유예하고 재검토하기로 결정, 재분류를 위한 연구를 의약품안전관리원에 맡겼다.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은 지난 12월 식약처에 연구결과를 최종 보고했으며 시민단체 등과 함께 피임약의 부작용 실태조사 및 설문조사, 산부인과의사회 등 전문가 의견을 수렴했다고 설명했다. 연구는 마무리됐지만 현재 연구용역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결과 공개일도 미정이다. 식약처는 이번 연구 결과 공개 시기나 방식에 대해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응급피임약(전문약)은 기존 매일 복용하는 일반 사전피임약(일반약)과 다르다. 경구피임약은 정상적인 여성이 임신을 피하게 해주는 합성여성호르몬제로 제품에 따라 프로게스테론 역할을 하는 레보노르게스트렐(Levonorgestrel), 게스토덴(Gestoden), 데소게스트렐(Desogestrel) 등 성분·함량이 조금씩 달리 들어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약을 먹으며 몸에 임신한 듯한 착각을 일으켜 배란·임신이 중지되는 원리를 이용한다.
반면 응급피임약은 고농도 프로게스테론을 집중 투여해 호르몬 변화로 자궁내벽이 탈락하는 원리를 이용,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시키는 방식을 활용한다. 2001년 첫 국내 시판 때부터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하도록 허가·판매되고 있다. 콘돔이 생각지도 않게 찢어졌거나, 강간 등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다만 급작스런 호르몬 변화가 여성의 몸에 부담을 줄 수 있어 일반 피임약보다 부작용 우려가 큰 게 사실이다.
젊은 성인 중에는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반기는 분위기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이모 씨(29·여)는 “응급피임약이 굳이 일반약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료계가 반대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막상 병원에 가도 처방전 한장 써주면 끝날 뿐 특별히 전문가로서 도움주는 일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의사에게 응급피임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말하면 특별히 물어보는 것 없이 처방전만 써주고 1만원의 진료비를 받는 게 부지기수”라며 “약사들이 오히려 복용법 등을 상세히 지도해주더라”고 말했다. ‘일부’ 의사들의 문제라고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경험을 겪는 여성이 의외로 많다.
은행원 문모 씨(27·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응급피임약은 성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피임성공률이 떨어지는데 주말이거나, 병원이 문을 닫은 시간엔 약을 구할 길이 없어 난처했었다”고 말했다.
응급피임약은 일반적으로 성관계 후 24시간 내에 복용하면 95%의 피임률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복용이 늦을수록 피임률이 떨어져 48시간 이내에 복용할 경우 85%, 72시간 이내에는 58% 그치게 된다.
소비자는 환영하고 있지만 의료·종교계 등의 반발은 거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약물 오남용, 무분별한 성문화 풍조 확산을 이유로 들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 25일 “식약처가 의료계와 종교계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던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을 재검토하려 한다”며 “의사회와 학회 등은 여성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어 “응급피임약은 일반 피임약의 10~15배에 해당하는 호르몬이 포함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될 수 있어 전문의와 상담 후 복용해야 하는 전문의약품”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제약계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오남용의 우려는 덜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응급피임약의 평균 피임성공률인 ‘85%’는 콘돔(75%)에 비해 약간 높은 수준이라 굳이 호르몬제를 투입하는 것보다 콘돔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다. 서울 강남구의 모 산부인과 의사는 “응급피임약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게 되면 성관계 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응급피임을 강요해 남성은 피임을 방관하고 여성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룰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며 “이로써 콘돔을 활용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성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또 응급피임약은 호르몬을 한번에 투하하는 만큼 자주 사용할수록 내성이 생기는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일반의약품으로 전환 시 어른들이 걱정하는 게 ‘미성년자들의 성관계’다. 어린 학생들이 응급피임약을 구입해 무분별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염려된다는 것. 실제로 응급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면 TV광고가 가능해져 어린 학생들도 약을 거부감 없이 복용하게 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일반약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2010년 응급피임약을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공급한 이후 성병과 임신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영국의 연구보고를 제시하며 일반약 전환이 청소년을 불건전한 성문화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지나친 해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청소년은 호기심에서 성관계를 갖는 만큼 ‘임신의 두려움’ 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할 뿐이다. 해가 갈수록 첫경험 연령이 어려지는 만큼 무조건 청소년과 성을 떼어놓을 게 아니라 올바른 성교육이 더욱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청소년들이 무분별하게 성생활을 즐기는 매개고리로 볼 게 아니라 혹시 모를 2차 피해를 막는 방어책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 청소년에게 응급피임약을 일반약으로 취급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응급피임약을 처방전 없이, 신분확인 후 15세 이상에게 판매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는 “응급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 임신율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는 입장이다.
소비자들은 약품 오남용으로 인한 건강문제를 우려하는 병원의 이야기를 이해하면서도 ‘의학적으로도 낙태와 다를 바 없고 성 문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시민단체나 종교계의 입장에는 냉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조금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주길 바란다는 의미에서다. 여성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임신한 아이를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상황을 책임지려는 여성을 비난하며, 성인 개인의 선택인 성생활을 ‘문란하다’고 비하하는 데 넌덜머리가 난다는 것이다. 또 낙태 자체가 금지된 상황에서 응급피임약까지 자유롭게 살 수 없는 상황은 불법 낙태수술 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여성의 건강에 더 큰 위협이 된다는 게 상당수 여성의 생각이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 식약처는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 여부에 대해 ‘묵묵부답’을 고수하고 있다. 식약처는 윤리적인 문제, 무분별한 임신으로 인한 현실적 문제를 절충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