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논설위원
美 육군소장 도망쳐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이 시기를 연구해 몇 권의 저서를 낸 이종각 동양대 교수는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에서 그날 함께 야간당직을 섰던 사바틴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첫 번째 일제사격에서 왕실 군인들은 모두 총을 한 발도 쏘지 않고 그냥 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복을 벗어던지고, 탄환을 버리고 달아났다.”
100여 년 전 굴욕과 통한의 역사를 다시 들추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한국 외교가 처한 작금의 상황이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6일 4차 핵실험 후 한 달도 안 돼 장거리 미사일까지 쏘려는 김정은 정권, 그럼에도 미국의 대북 제재 요구를 거절한 중국, 그런 중국에 매달렸던 박근혜 정권, 한국과는 위안부 문제 등으로 각을 세우는 사이 중국과 경제협의체를 구성한 일본, 한국 정부가 어렵게 입을 뗀 ‘5자회담’을 거부한 러시아까지…. 한국 외교에 ‘퍼펙트 스톰’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고종의 경호원이었던 미국 군인들도 명성황후를 지켜주지 못했다. 북핵보다는 이란 핵문제 해결에 올인(다걸기)했던 미국은 이제 11월 대선에 제 코가 석 자다. 한미동맹이라고는 개념조차 없는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아니 공화당 후보라도 된다면…. “그럴 리 없다” 손사래를 치는 외교부 관계자들이 최악의 시나리오에는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보다 훨씬 험악한 외교 지형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단합된 국론 아래 신속 단호한 행동으로 주변국이 두려워하고, 강대국도 어쩌지 못한다. 북이 핵실험을 하자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가 뭐했느냐’고 비판하다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을 검토하겠다니 ‘사드가 한중관계보다 중요하냐’고 어깃장을 놓는 분열상이 북의 핵과 미사일보다 훨씬 위험하다.
국론분열 북핵보다 위험해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