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 600조 돌파]
○ 재정여력 갈수록 약해져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위기를 극복한 데는 탄탄한 재정의 역할이 컸다. 내수와 수출이 위축될 때마다 정부는 과감하게 재정을 확대해 경기 회복의 불씨를 살려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41조 원 재정 패키지, 두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등 각종 재정 보강책을 쏟아내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정부가 위기 때마다 ‘재정 확대 카드’를 꺼내들 수 있었던 것은 재정건전성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양호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매년 증가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1년 5개월 전만 해도 정부는 올해 국가채무를 615조5000억 원으로 예상했지만 지난해 9월 그보다 30조 원가량 더 늘어난 645조2000억 원으로 수정했다. 그나마 올해 경제성장률이 3%대를 달성해야만 이 정도로 국가채무를 막을 수 있다. 내수와 수출의 ‘쌍끌이 부진’으로 인해 3%대 성장률 달성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예상보다 1년 빠른 내년에 국가채무가 700조 원을 넘어설 것이란 관측마저 나온다.
국가채무(중앙·지방 정부 채무)와 비금융 공기업, 비영리 공공기관을 합친 공공 부문의 부채는 2014년 말 957조3000억 원으로 사상 처음 900조 원을 넘어섰다. 이런 추세라면 지난해 1000조 원을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 돈 쓸 곳은 곳곳이 지뢰밭
상황이 이렇지만 정부가 매년 돈을 써야 할 곳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정부는 3일 21조 원 이상의 단기부양책을 내놓았다. 재정 조기 집행에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을 경우 또다시 추경 편성론이 제기될 수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나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처럼 돌발변수가 발생해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재정건전성에 대한 일각의 우려를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무작정 재정건전성만을 걱정해 나라곳간을 잠글 시점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경기침체로 성장동력이 멈추면 세수가 줄어들게 돼 재정이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며 “골든타임을 놓치기 전에 경기 회복의 불씨를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 “페이고 원칙 의무화 시급”
이에 전문가들은 돈 풀기식 단기부양책이 갈수록 한계에 부닥치는 상황에서 중장기적 재정건전성 강화 대책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재정 소요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복지제도부터 도입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근절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페이고(pay-go·법을 만들 때 이에 대응되는 세입 증가책이나 다른 지출 감소책을 동시에 입법하는 것) 원칙을 의원입법에도 의무화하는 게 필수적이다.
지난해 국회법 개정으로 법안을 의원들이 발의할 경우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적는 ‘법안 비용추계서’를 필수적으로 첨부하도록 했다. 하지만 긴급한 사유가 있을 경우 상임위원회의 의결로 비용추계서 첨부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놓은 탓에 벌써부터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비용추계서 첨부에 그치지 않고 재원 조달 방안도 함께 마련하도록 강제해야 포퓰리즘 입법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세종=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