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달 사회부 차장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얼마 전 e메일을 한 통을 받기 전까지는. 3년이 다 됐지만 그들은 아직도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앳된 여중생이던 딸은 어느덧 여고생이 됐고, 여드름투성이 아들은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그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있는 한국마사회 용산 화상경마장(장외발매소) 얘기다. 주민들은 이곳을 ‘화상 경마도박장’이라고 부른다. 4일 오전 농성 중인 주민 20여 명은 화상경마장 앞 노숙농성장에서 정성스레 음식을 차려놓고 합동 차례를 올렸다. 차례상 앞에는 ‘우리의 교실을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이날은 반대투쟁에 나선 지 1009일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농성장에서 맞는 세 번째 설이다. 이들은 왜 거리로 나온 걸까.
국민권익위원회도 학습권의 심각한 지장이 우려된다며 주민의 손을 들어줬다. 선생님과 학생들까지 시위에 동참했다. 감사원에 두 번이나 감사해 달라고 청구했고, 형사 고발도 여러 차례 했다. 심지어 청와대, 국무총리실, 농림축산식품부에도 호소했다. 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주민 반대에도 화상경마장은 2014년 6월 임시 개장했고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 마사회의 입장은 강경하다. 가장 가까운 성심여고가 215m 떨어져 있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한다. 현행 학교보건법에는 유해시설 허가 때 교육시설로부터 200m 내 설치를 제한하고 있다. 마사회는 ‘돈만 버는 장외발매소’가 아닌 국민 및 지역과 상생하는 신개념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이미 개장 승인도 났기 때문에 찬성으로 돌아선 주민들도 있다. 적법하게 허가받은 시설을 폐쇄하면 행정의 신뢰가 떨어진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단 10여 m 차이로 법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생각하는 화상경마장의 역기능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아직 농성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마사회와 주민 간 갈등은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1000일 넘게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점점 잊혀지고 있다. 반대 주민들은 오늘도 대답 없는 화상경마장을 바라보며 ‘영업 중단’을 외치고 있다. 한때 주민투표로 해결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자칫 더 큰 주민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방법은 대화밖에 없다. 이 지루한 싸움을 이제 끝내야 한다. 주민들과 마사회의 결단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