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갑식 문화부장
스님 책의 삽화를 그려줘 인연을 맺은 화백의 그림을 빼면 별 장식이 없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이른바 홍보란 것도 해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아니냐, 따지듯 물었더니 스님은 “방송 출연이다 책이다 해서 얼굴이 알려져 조금만 소문내도 내실 없이 시끄럽다. 요란스럽기보다는 부족한 것을 하나하나 차분히 채워가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윽고 자리를 옮겨 오랜만에 스님이 한 턱 내는 점심을 막 시작할 참이었다. 책의 추천사를 쓴 이해인 수녀에 대해 묻자 스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모 수녀요?”
“서로 ‘조카 스님’ ‘이모 수녀님’, 이렇게 불러요.”
이들은 4년 전 한 일간지의 주선으로 대담을 나눈 뒤 자연스럽게 이렇게 부르게 됐다고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해인 수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나 불러도 따뜻하고 친근한 속세의 이모처럼 느껴졌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이후 두 사람은 자신이 관련된 행사에 서로를 초대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수시로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안부를 나누고 있다.
불교와 가톨릭의 다른 구도자이지만 의외로 닮은 점이 많다. 독신으로 살아간다, 자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삶을 산다, 공동체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
종교인들의 격의 없는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과거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 월주 스님의 교류는 아름다운 동행의 대표적 사례였다. 이들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에 금 모으기 운동에 함께 나섰고, 사회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어른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촉구했다. 만약 한쪽의 목소리만 전해졌다면 진보 또는 보수의 목소리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각각 길상사와 명동성당을 찾은 것도 당시로서는 종교를 뛰어넘는 거인의 행보였다.
2년 전 천주교 춘천교구장을 지낸 장익 주교와 비구니 정목 스님의 만남도 기억이 난다. 당시 스님이 노(老)주교에게 “절집의 큰 어른 스님 같다”고 하자, 장 주교는 “오늘 스님들과 옷 색깔 좀 맞췄다”며 웃었다. 부녀의 상봉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종교계의 마당발’로 불리며 인명진 목사, 세영 스님 등 다른 종단의 성직자와 잘 어울리는 홍창진 신부의 말이다. “어느 집단이든 같아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스스로를 신비화하면서 귀는 닫고 고집은 세집니다. 반면 이웃 종교인들을 만나면 부족한 점을 느끼고 다른 장점들을 배우게 됩니다.”
자비와 사랑을 얘기하는 종교인들에게 아름다운 동행은 시대적 과제다. 그 동행은 같아지라는 게 아니다. 다르기 때문에 그 화합의 하모니가 우리 사회에 주는 울림이 더 큰 것 아닐까.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