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 ‘정치혁명 돌풍’ 주역 샌더스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9)의 대세론을 위협하며 정치혁명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75·사진)은 ‘바보 중에 바보’다. ‘젊어서 진보(좌파)가 아니면 바보요, 늙어서도 진보면 바보’라는 말에 비춰보면 그는 영락없는 바보다. 미국 연방 상원과 하원을 통틀어 ‘가장 왼쪽에 있는 정치인’ 샌더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socialist)라 부른다. 1983년 3월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에 재선됐을 때 “시장이 (사회주의자라도) 시 행정을 지혜롭게 잘 이끌기만 하면 주민들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급진적인 그의 경제공약에 미국 보통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폴란드 출신 유대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유대인 집안 출신의 뉴요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에겐 여덟 살 많은 형(래리)이 있었다. 뉴욕 브루클린대의 정치 단체인 ‘젊은 민주당원’에서 활동하던 형은 도시재개발 반대 운동에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녔다. 틈틈이 사회주의 관련 책을 읽히기도 했다. 샌더스는 훗날 “내 정치적 사고가 처음 형성되는 데 형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브루클린 제임스매디슨 고교를 졸업한 후 하버드대 진학을 꿈꿨지만 유대인을 10% 이상 뽑지 않는 할당제 때문에 고배를 마셨다. 시카고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뽑히고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브루클린대에 진학했다. 몇몇 언론은 “만약 샌더스가 하버드대에 합격했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샌더스는 어머니를 여읜 후 1961년 ‘붉은 학교’로 불리던 시카고대에 편입했다. ‘인민의 젊은 사회주의자 연맹’에 가입해 러시아혁명,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인종차별 반대, 반전 평화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해리 재프 기자는 저서 ‘왜 버니 샌더스가 중요한가’에서 “시카고대 재학 시절 샌더스는 친구들에게 ‘자본주의는 망했다’며 사회주의를 설파하곤 했는데 상대가 설득되지 않으면 분해서 밤잠을 설칠 정도로 ‘골수 좌파’였다”고 썼다.
미국 역대 정치인 중 영감을 준 인물로 미국 노동조합 운동가이자 사회당 대선후보를 지낸 유진 데브스(1855∼1926)와 노동인권 옹호론자였던 존 피터 알트겔드 전 일리노이 주지사(1847∼1902)가 꼽힌다. 데브스가 샌더스에게 ‘미국에도 사회주의자의 길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면 알트겔드는 급진적 행정가의 모델이 됐다. 샌더스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알트겔드 전기’다. 알트겔드는 무정부주의 노동운동가들의 사면을 단행하고, 데브스가 주도한 철도노조 파업을 진압하려는 연방정부 군 투입을 정면 반대해 공산혁명가라는 비판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샌더스는 1972년 31세 나이에 버몬트 주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2.2%의 형편없는 득표율로 낙선했다. 1981년 같은 주 벌링턴 시장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될 때까지 10년간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정치 낭인으로 살았던 시기다.
4선 시장, 8선 연방 하원의원, 재선 상원의원을 거치는 동안 ‘사회주의자 샌더스’라는 고유의 정치 색깔을 유지했다. 사회주의가 깊이 체화돼 있는 사람이다. 대표 공약인 ‘공립대 등록금 무효화’에는 대학 등록금을 은행 빚과 아르바이트로 변통해야 했던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샌더스가 경쟁자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월가와의 분명한 대립각이다. 공약 중 △최저임금 인상 △투기자본 과세 △노동조합 활성화 △남녀 임금 차별 해소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건강보험은 월가와 대기업들이 난색을 표하는 과격한 정책이다. 미 상원에서도, 대선 출마선언 후에도 “정부가 월가를 규제하는 게 아니라, 월가가 정부와 의회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대형 은행들의 부실과 불법 경영 때문 아니냐” “너무 커서 망하게 할 수 없는 기구(거대 은행)는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클린턴 전 장관이 월가에서 받은 정치자금은 공화당 젭 부시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나는 소액기부자들의 정치자금으로 선거를 치른다”고 말한다.
대표적 월가 인물인 골드만삭스 로이드 블랭크파인 회장은 최근 “샌더스의 주장은 위험하다”고 TV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샌더스와 비슷한 성향인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은 “개혁 대상이 감히 누구를 비판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가 만난 월가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중도 세력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자본주의 최전선 미국에서 샌더스 같은 사회주의자의 급부상은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진 고단한 미국 보통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2011년 월가 시위 현장에 쏟아져 나온 것이 샌더스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 이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