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재일동포들의 그날과 오늘
○ 대피방송 듣고도 뭔지 몰랐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5분. 김 씨는 집에서 저녁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인은 생활비에 보태겠다면서 시급 800엔(약 8400원)을 받는 커튼 공장에 일하러 나간 터였다. 갑자기 땅에서 큰 진동이 느껴지며 냉장고 등 가전제품들이 쓰러졌다. 밖에 뛰쳐나가니 흔들리는 전봇대가 보였다. 동일본 대지진 5년을 맞아 2일 센다이 시내의 한 식당에서 기자를 만난 김 씨는 “세상의 끝이구나 싶었다”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다들 초등학교 옥상으로 대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별생각 없이 아내가 오면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일본인 아내 마유코 씨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던 재일동포 김일광 씨(뒤)의 가족사진. 사진 속 아내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김일광 씨 제공
한국 음식을 해 주면 “힘이 난다”면서 좋아했고 남편을 위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던 아내였다. 남한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 허투루 쓸 줄 몰랐다.
김 씨는 관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세 자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돌봐주겠다고.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눈가를 훔치던 김 씨는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이들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 “남편 잃고 매일 눈물” 결국 귀국 선택
한국 외교부에 따르면 2011년 당시 지진과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한국인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 와서 국적을 바꾸지 않은 조선적(朝鮮籍)을 포함해 모두 12명이다. 하지만 일본인 가족을 잃은 경우를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유가족 중에는 김 씨처럼 일본에 남은 이들도 있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다.
정영희(가명·47) 씨는 2007년 일본에 와서 일본인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다. 문화 차이 등으로 일본 시부모와 같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힘들 테니 너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남편의 따뜻한 말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혼 위기가 있었을 때도 남편은 “내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아내가 일본에서 살 수 없다”며 부모를 설득해 결혼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2010년 말 유방암이 발병했고 림프샘 제거 수술을 받았다. 힘든 투병 생활을 보내던 중 3월 11일이 됐다. 지진 직후 놀라서 남편에게 ‘괜찮냐’는 메시지를 보냈더니 ‘나는 괜찮은데 부모님이 걱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가 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더 이상 답이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남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정부가 마련해 준 가설주택 생활은 쉽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거나 혼자 운전을 할 때마다 남편 생각에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다. 정 씨는 결국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일본을 떠나 2013년 말 영구 귀국했다. 그는 현재 유방암이 재발해 투병 중이다.
결혼 이민을 연구해 온 이선희 도호쿠(東北)대 동북아시아연구센터 연구원은 “쓰나미 피해를 입은 도호쿠 지역에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여성 상당수가 결혼 후 정착했다”며 “쓰나미로 남편을 잃은 뒤 체류 자격이 없어져 시가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돌아간 이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센다이=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