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일군 과학기술 50년]<中> ‘IT 국가대표’ ETRI
오늘날 우리나라를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 있다. 올해 설립 40주년을 맞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다. 197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연구소로 세워진 ETRI는 이후 전자, 전기, 통신의 3개 전문 연구소로 운영되다 1981년 현재의 ETRI처럼 한 기관으로 통합됐다.
현재 ETRI는 세계 주요 연구기관 가운데 연구인력당 논문, 등록특허생산성 등 2개 분야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2014 미국특허 종합평가’에서는 3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40년 동안 ETRI의 누적 기술료 수입이 7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 영화 속 홀로그램, 세계 최초 개발
테이블 위에 알록달록한 정육면체 영상이 떠올랐다. 앞뒤좌우 자리를 옮길 때마다 서로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평면 영상이 아닌, 볼륨감이 살아있는 3차원(3D) 입체 영상이다. 지난해 ETRI는 영화 ‘스타워즈’에서 ‘레이나 공주의 영상’으로 잘 알려진 3차원 컬러 홀로그램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전까지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20도 이내의 제한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홀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그쳐 가장 완전한 홀로그램 기술로 평가받는다.
10c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영화 1편에 달하는 대용량 데이터를 3초 만에 전송할 수 있는 차세대 근접무선통신 ‘징(Zing)’ 기술 개발도 세계 최초다. 이는 초당 3.5기가비트(Gbps)급의 인터넷 속도로 기존 근거리무선통신(NFC) 기술보다 전송 속도가 8000배나 빠르면서 소모 전력은 4000분의 1에 불과하다. 휴대용 저장장치(USB메모리)처럼 꽂을 필요가 없어 기기 간 동기화가 거의 실시간으로 가능해진다.
지하철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이동무선백홀(MHN)’ 기술도 ETRI가 자랑하는 세계 최초 기술이다. 지금까지 지하철 와이파이는 10메가비트(Mbps)급 속도로 제공되고 있어 느리고 자꾸 끊기지만 이 기술을 적용하면 100배 빨라진 1기가비트급 속도가 제공된다. 지하철 내 같은 칸에 탄 30명이 각자 고화질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이다.
○ ETRI 개발 인공지능, 연내 인간과 퀴즈 대결
ETRI에는 세계 최초는 아니더라도 기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술이 즐비하다. 사람 없이도 스스로 주행하는 무인자동차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눈’ 역할을 하는 3차원 영상센서 ‘라이다(STUD 레이저 레이다)’ 기술에서 ETRI는 세계 최고로 꼽힌다. 현재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 구글 무인자동차의 라이다보다 해상도가 4배 높다. 또 구글의 라이다는 차 지붕 위에 불쑥 튀어나오게 설치해야 하지만 ETRI는 차체 내에 장착할 수 있어 승산이 있다.
자동 통·번역 기술에서도 선두 주자인 구글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자동으로 인식해 통역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국내 토종 소프트웨어 기업인 한글과컴퓨터에 이전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한국어 통역에선 단연 세계 최고다. ETRI는 현재 80%인 통역 성공률을 더 끌어올리고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통역 기능을 추가해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ETRI에서 개발하고 있는 인공지능 ‘엑소브레인(Exobrain)’은 올해 인간과의 지식 대결에 나설 예정이다. 엑소브레인은 복잡한 자연어를 이해하고 정답 후보를 추론한 뒤 최적의 답을 내놓는다. 매일 20개 일간지에서 기사 5000여 건을 읽고 한국 위키백과를 통해 신조어를 꾸준히 학습하며 실력을 쌓고 있다. 김현기 지식마이닝연구실장은 “현재 장학퀴즈 주장원전에서 우승할 정도의 수준”이라며 “앞으로 영어와 같은 외국어 지식도 습득해 특허나 법률, 의료 등 전문적인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상용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세계 최초 상용화 기념식에서 이수성 전 국무총리(왼쪽)가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다. CDMA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주요 연구성과 가운데 경제적 파급효과가 약 54조 원으로 가장 큰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제공
ETRI는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인해 전체 인원의 20%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연구개발(R&D) 활동이 위축되는 등 위기를 겪었다. IT 대기업의 R&D가 강화되면서 ETRI 역할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후 ETRI는 기업이 하기 힘든 미래 먹거리를 위한 기초원천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ETRI에 마련된 ‘기가코리아 사업단’이 대표적이다. 2020년 모든 사람이 기가급 모바일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하는 일을 목표로 하는 대형 국책 과제의 본부가 ETRI에 설치됐다. 또 개발한 기술이 상용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체계를 정비해 ‘강견기업(강한 중견기업)’ 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임주환 전 ETRI 원장(현 한국정보통신산업연구원장)은 “지금까지 ETRI가 ICT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거뒀다면 앞으로는 자동차, 의료,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ICT를 접목하는 융합 연구에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전=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