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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기자의 교육&공감]선행학습의 악순환

입력 | 2016-02-15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김희균 기자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도무지 얼굴 볼 시간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회사에서 남은 휴가를 모두 쓰라고 해서 지난 연말 일주일 휴가를 냈는데, 정작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가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못했다고 했다. “겨울방학인데 가까운 데라도 놀러가지 그랬어요?”라고 물었다가 물정 모른다는 핀잔만 들었다. 4주 동안 중학교 1학년 수학과 영어를 끝내는 학원 특강을 듣느라 꼼짝할 수 없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경쟁적인 교육 풍토를 해소해 보자며 학부모 모임까지 만들었던 선배의 입에서 선행학습 얘기가 나오니 의외였다. 사교육 업계의 선행학습 진도와 강도는 날로 독해지고 있다. 올해 중학교 자유학기제 전면 실시를 앞두고 예비 중학생을 겨냥한 ‘자유학기제 마케팅’이 성행하는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고교 과정 선행반까지 등장할 정도다. 심지어 이런 특강에 초등학교 4학년부터 등록을 받는 학원도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전국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고교 2학년 각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수학과 영어의 선행학습 실태를 조사한 결과 선행학습을 한다는 비율이 학년과 과목에 따라 29∼61%에 달했다. 특히 학년이 낮을수록 선행학습을 하고 있다는 응답이 높았다.

선행학습과 성적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는 무수히 많다. 선행학습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폐해를 끼친다는 연구 사례 역시 쌓여가고 있다. 학부모들은 선행학습에 따른 사교육비 부담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학습의 악순환이 깊어지는 이유는 뭘까?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진이 초중고교 학생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실시한 결과 초등학생들은 ‘엄마의 강요’를, 중고교생은 ‘불안감’과 ‘분위기 동조’를 선행학습의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자녀들에게 선행학습을 강요하는 주범으로 지목된 학부모들의 입장은 어떨까?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불안감 때문에, 중고교생 학부모들은 학원의 마케팅 전략과 홍보 때문에 선행학습을 시킨다고 말했다. ‘나만 안 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당신만 안 시키는 것 맞습니다!’라고 하는 학원의 속삭임이 결합해 이 땅의 학부모들은 어느 순간 선행학습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런 기류는 아이들에게도 시나브로 전염된다. 어릴 때는 “엄마 때문에 선행학습을 한다”고 말하던 아이들이 중고교생이 되면 스스로 “불안해서” “다들 하는 분위기니까” 선행학습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유명 사교육 강사들과 오래 친분을 쌓고 속내를 터놓다 보면 “우리 아이에게는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다”고 털어놓는 이들이 적지 않다. 두 자녀를 모두 이른바 ‘SKY대’에 보낸 한 영어 강사는 “우리 아이들은 학원에 많이 보내지 않고, 본인이 꼭 하고 싶다고 할 때만 한 학기 과정 이내로 선행을 시킨 것이 좋은 성적의 비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을 비롯한 주요 교육 이론들은 연령에 맞는 수준을 넘어서는 지식이 주입되면 아이들은 그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지식 습득을 포기해 버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선행학습 실태를 조사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진은 “많은 한국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내용과 관련 있는 구체적인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진도를 나가는 실정이며, 사교육 기관에서 선행학습을 함으로써 발달에 근거한 학습보다는 내용도 모른 채 문제 패턴을 단순 암기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 강남의 특수목적고 전문 학원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중고교 영어 선행 강의를 하는 한 강사는 “실제로 이 정도의 선행학습을 제대로 소화하는 학생은 10% 정도뿐”이라며 “수강생 가운데 70∼80%는 학원의 임차료와 전기료를 내주러 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겨울방학 동안 과도한 선행학습에 시달린 학생과 학부모라면 과연 그 시간이 발달 연령에 맞는 학습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외우기만 한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