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알아서 해줘.” “형. 최대한 나답게 해줘요.”
1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연습동의 한 스튜디오. 국립발레단 단원들과 스태프들의 올해 공연 포스터 등에 쓸 프로필 촬영이 한창이었다. 사진기 앞에 서면 긴장할 법도 하지만 단원들에게는 여유가 넘쳤다.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자기 차례가 오자 촬영보다 사진작가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단원들의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날 촬영을 담당한 박귀섭 사진작가(33)가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국립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했던 발레리노 출신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발레를 잘 알고, 단원들과도 친한 사진작가다. 박 작가는 2006년 입단해 2007년 뉴욕 인터내셔널 발레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잘 나가던 그가 2010년 발레단을 그만둔 이유가 궁금했다.
10년 넘게 발레만 했던 그가 ‘정글’ 같은 사회에 안착하기 쉽지 않았다. 재능 있는 발레리노였지만 사진에는 초보였다. “포트폴리오를 보고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 실력보다 어디서 일하는지, 어디 출신인지, 누구 밑에서 일했는지가 더 중요했어요.”
어렵사리 패션사진 쪽에서 자리를 잡아 갈 즈음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발레와 인연을 맺었다. “무용복 가게를 운영하는 선배에게 제품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이 왔어요. 당시 화보처럼 찍은 사진이 나름 유명해졌어요. 그 사진을 본 국립발레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시 그는 다시 발레 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길로 걷겠다고 했는데 그 분야로 복귀하는 듯한 모습이 싫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국립발레단 만큼 ‘최고의 피사체’가 모인 곳은 없어요. 여기서만큼은 제 최고의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사진이 ‘무용수들의 몸과 동작을 제대로 잡아낸다’는 소문이 나면서 국립발레단을 비롯해 서울예술단, 정동극장, 국립현대무용단 등 많은 무용 단체들의 촬영 요청이 이어졌다. “사진작가로 나설 때만 해도 마이너스가 됐던 발레 경력이 오히려 플러스가 되고 있어요.”
“제가 상상한 이미지를 몸으로 표현해준 동료, 선후배 무용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앞으로 한국 무용수들을 제 사진을 통해 해외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