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기호 소설가
좀 전에 우리 성수동 형님도 한 말씀 하셨지만, 실은 저도 이번 설 명절에 며느리와 사달이 한 번 났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며느리를 본 지 벌써 15년쯤 되었네요. 아시는 분들 다 아시겠지만, 우리 며느리가 학교 선생님입니다. 중학교 수학 선생. 똑 부러지고 야물딱지지요. 좀 무뚝뚝하고 잔정은 없어도, 나는 뭐 그만하면 됐다, 생각했습니다. 우리 형님들과 동상들이, 며느리가 매일같이 전화도 해주고 주말마다 찾아온다고 자랑도 많이 하지만, 나는 그런 거 하나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끼리 잘 지내고, 저희끼리 알콩달콩 살면 더 바랄 거 없다, 그렇게 생각해왔으니까요. 그래서 명절 때도 며느리 고생 안 시키려고, 차례 음식도 미리 다 해놓고 장도 미리 다 봐 놓고, 해마다 그랬습니다. 철마다 고춧가루니, 김치니, 젓갈이니, 빠뜨리지 않고 보냈고요, 명절 때도 차례 지내고 나면 꼬박꼬박 제가 먼저 친정에 가라고 등 떠밀고 그랬습니다.
아, 근데, 우리 며느리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작은 방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는데, 며느리가 발길로 툭툭 그 등짝을 치면서, 당신이 어서 얘기하라고, 처가에도 오랜만에 오는 형제들 다 있다고, 시누이는 작년 결혼하고 나서도 봤지 않냐고, 그렇게 채근을 하더라구요. 그 모습을 제가 딱 보고 말았죠…. 아, 그랬더니 속에서 열불 천불이 나더라구요. 내가 이날 입때까지 며느리 힘들게 한 게 뭐 있었던가, 눈치를 봤으면 내가 눈치를 봤지, 뭐 불편하게 한 적 있었던가, 자기가 학교 선생이면 선생이지, 서방한테까지도 어디 선생질인가…. 뭐, 그런 생각들까지 다 드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며느리 앉혀 놓고 속 시원히 할 말 다했지요. 네 남편이 지금 직장을 잃어서 잠시 저러고 있다고, 네가 지금 시어미도 무시하는 거냐고, 매해 친정 안 간 적 있느냐고…. 그랬더니, 우리 며느리가…. 세상에,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따박따박 말대답을 합디다. 자기가 가장처럼 몇 년을 집안 살림 혼자 책임졌다, 남편이라고 매일 집에서 게임만 한다, 명절에도 도와주는 거 하나 없다, 그래도 제가 언제 시부모님 용돈 한 번 거른 적 있냐, 이번 명절에 자기 친정에는 미국으로 시집간 언니가 온다, 운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제가 기가 턱턱 막히더라구요. 아들이 저렇게 놀고 있으니까 며느리한테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제가 소리쳤습니다. 오냐, 그렇게 네가 잘났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아, 그랬더니 이 며느리가 정말 명절 차례만 지내고 남편 앞세워서 친정으로 가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오늘 이때까지 이렇다 저렇다 연락 한 번 없고….
형님 동상들은 제가 지금 무엇 때문에 며느리한테 화가 났는지, 왜 그때 그렇게 열불 천불이 났는지, 다들 잘 아시죠? 네, 맞습니다. 다른 거 없어요. 금쪽같은 내 아들 등짝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린 거. 그게 제일이지요. 며느리도 나중에 아들 키워서 장가보내 보면, 그때 되면 다 알게 될까요? 제 영감 등짝을 다른 여자가 툭툭, 발끝으로 건드리는 느낌, 그거랑 똑같다는 거…. 며느리가 알까요? 나는 며느리가 먼저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릴 작정입니다. 자기가 깨달아야지, 누가 뭘 가르칩니까? 안 그렇습니까, 형님 동상들?
이기호 소설가